▲연기군 남면 수멍재 학살 현장 및 비성골 발굴장 위치
김영희
필자는 2018년 아산 설화산 발굴 후 몇 개월 되지 않아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 257-2번지(비성골)에서 발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순간 유난히 마음이 설레었다. 누가 부르는 듯이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비성골로 향했다.
이 지역은 1950년 7월 초 조치원경찰서에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트럭으로 싣고 가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남면 공정리 은고개에서 집단학살 후 비성골에 매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은고개 일대에는 1지점과 2지점에서 학살이 있었는데 1지점은 여자를, 2지점에서는 남자를 학살하고 매장했다. 비성골 매장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가해자와 지휘명령 주체
충청남도는 전쟁 발발 다음 날, 상급 기관인 충남경찰국의 지시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형무소 경비의 건'을 시작으로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등 보도연맹원 포함 예비검속을 단행한다.
당시 충남 각 지방경찰서에 하달된 지휘·명령체계를 살펴보면 내무장관 백성욱(1950.2.7.~7.17)→치안국장 장석윤(1950.6.17.~7.17)→충남경찰국장 이순구(1949.6.20.~1950.7.20.)→각 경찰서장→각 지서 주임으로 내려졌다.
이러한 지휘·명령체계는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경찰도 군의 지휘∙명령체계에 속하게 되면서 계엄사령관(정일권)이나 헌병사령관(송요찬)의 지시를 직∙간접적(계엄법 제9조)으로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의 주공격 선상에 있던 지역에서는 후퇴하던 제17연대도 부분적으로 가해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남지역에서 활동했던 특무대라면 방첩대(SIS) 대전 소속으로 추정된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육군무관 밥 에드워드의 보고서'에는 미군에 의해 촬영된 현장 사진이 설명과 함께 동봉되어 있다. 이것은 사살 현장에 미 대사관 직원과 미 극동사령부(FEC)소속의 장교 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 정부도 충분히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런던 주재 미국대사관은 위닝턴의 이야기를 '학살조작(atrocity fabrication)'이라며 부인하였다. 미국은 자국민의 기자를 조작자로 모독했다.
비성골 학살의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