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전 앞 품계석. 종4품부터는 정 품계석만 세워져 있어 총 24개다.
서부원
흡사 미로처럼 얽혀있는 궐내각사에선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드문드문 마주치는 이들이라곤 외국인 관람객들뿐이었다. 그들은 회랑처럼 이어진 작고 빼곡한 건물들이 신기한 듯 툇마루에 걸터앉아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궐내각사는 창덕궁의 중심인 인정전과 연결되어 있다. 왕의 부름을 받은 관료들이 문턱이 닳도록 오갔을 길이다. 어도와 품계석이 정연한 인정문에서 마주한 권위적인 인정전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는 법, 궁궐이라고 다를 리 없다.
인정전은 건물 안팎의 분위기도 아예 딴판이다. 외부는 익숙한 '한국식'인데, 내부는 어좌와 닫집 등을 제외하곤 죄다 '서양식'이다. 유리창에 장식된 황금색 커튼과 전등마다 덧씌워진 전등갓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흡사 한옥 내부를 양옥으로 리모델링한 '퓨전' 건물 같다.
그중에도 눈에 띄는 게 마룻바닥이다. 창덕궁은 물론, 그 어떤 목조 건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다. 몇 해 전 이탈리아 여행 때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서 봤던 '헤링 본(청어 뼈)' 문양과도 닮았고, 네모의 바람개비 형태 같기도 하다. 전통 관복을 갖춰 입은 관료들이 이 위에 서 있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어색하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흔적인데,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할 때도 마룻바닥만큼은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건물에 켜켜이 아로새겨진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자 복원의 의미를 성찰해보게 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내부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직접 맨발로 디뎌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인정전에서 인정문을 향해 내려다보면, 품계석이 왕을 알현하듯 도열해있다. 정1품 정승부터 종9품의 말직까지 설 자리를 표시해둔 것이다. 왕의 왼편엔 문관, 오른편엔 무관이 자리했다고 한다. 대하사극 속 두 손에 홀을 든 채 머리를 조아리는 관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정1품부터 종9품까지 18관등이면 품계석이 총 36개여야 맞는데 24개뿐이다. 찬찬히 뜯어보면 종3품까지만 정3품 아랫자리에 세워져 있고 종4품 이하는 정 품계석만 있다. 종3품이 고위직과 하위직을 가르는 기준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정3품 이상은 왕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뜻의 '당상관'으로 불린다.
국가적 의전 행사가 열리는 인정전을 돌아 나오면, 어깨동무하듯 선정전이 자리한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건 지붕의 화려한 청기와 때문이다. 양난 후 수백 년 동안 왕의 편전으로 사용된 건물이어서 해방 후 대통령의 집무 공간에도 청기와를 올리지 않았을까 유추해보게 된다.
선정전의 뜬금없는 청기와는 본디 창덕궁의 건물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옛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자 광해군이 인왕산 자락에 세운 인경궁 건물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인경궁은 인조반정의 직접적 원인이 됐을 만큼 국가재정에 부담을 준 역사(役事)였다.
입구에 세운 복도,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