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생명평화기행에서 강연하고 있는 염광희 박사
박제민
독일의 에너지 전환, 성과와 과제
시작하면서 아고라 이야기를 잔뜩 한 이유는, 이번 생명평화기행의 첫 번째 일정으로 만난 분이 아고라에서 한국 담당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염광희 박사이기 때문입니다. 염 박사는 원자력을 공부하고 환경단체에서 일하다가 독일로 유학하여 '재생가능에너지 입지갈등'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독일 베를린자유대 환경정책연구소에서 일하다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 기후환경비서실 행정관으로 일했고, 지금은 아고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날 강의 주제는 '독일의 에너지 전환, 성과와 과제'였습니다. 독일의 에너지 전환의 최대 성과는 완전한 탈핵을 이뤘다는 것입니다. 1998년에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녹색당이 적록연정을 구성하면서 탈핵에 합의했고, 2002년에 원자력법 개정하여 독일의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이 집권하자 핵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기로 했죠. 그런데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가 터지면서 핵발전소 수명 연장 계획 결정은 철회되었습니다. 마침내 2023년 4월 15일에 마지막 핵발전소 3기를 폐쇄하면서 독일은 역사적인 완전 탈핵을 이루었습니다.
독일은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8기의 핵발전소의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전력 생산량에 차질없이 여전히 전력 생산량이 소비량보다 많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2023년 상반기를 기준으로 재생에너지를 통한 전력 생산이 50% 이상을 감당하고 있는데, 이는 온실가스의 획기적 감축으로 이어져 1990년 대비 약 40%의 온실가스가 줄어들었습니다. 재생에너지의 확대는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졌으며, 2022년 기준으로 약 199억 유로(약 27조 원)을 투자하여 약 238억 유로(약 32조 원)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습니다.
에너지 전환 정책이 환경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과제도 있습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약 두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가격의 급등은 에너지 전환이 기후 보호뿐만 아니라 에너지 안보 측면도 동시에 만족시키는 대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궁극적인 대안은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면서 동시에 자체적으로 더 많은 재생에너지를 보급하는 것입니다.
시민운동과 정치를 통해 만들어 낸 에너지 전환
독일의 에너지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고, 어떤 성과를 내고 있으며, 앞으로 과제에 대응해나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관한 대답은 시민운동을 통해 제도화된 정치입니다.
1973년에 독일 정부는 비일(Wyhl)의 포도밭에 핵발전소를 짓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농민 등이 핵발전소 터를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해 탄압하자 전국적으로 반핵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비일 근처의 대학도시인 프라이부르크 등에서 반대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결국 전국에서 모인 약 3만 명의 시위대가 핵발전소 터를 다시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975년에 독일 정부는 비일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비일 핵발전소 반대 운동은 독일 '신사회운동'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신사회운동은 곧 '신정치정당'으로 이어졌습니다. 기성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녹색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가담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미 1977년부터 녹색 후보들이 지역 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1980년 1월에 전국 규모로 녹색당이 출범했습니다. 녹색당은 창당 직후인 1980년 선거에서는 원내 진출에 실패했지만, 1983년 선거에서 5.6%를 득표하여, 마의 5% 진입장벽을 돌파하면서 27명의 의원을 연방의회로 진출시켰습니다. 오랫동안 독일 정치를 지배해왔던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사회민주당(사민당)-자유민주당(자민당)의 3당 체제가 붕괴한 '사건'이었습니다.
1986년 체르노빌 핵사고 이후에 독일의 반핵 여론은 더욱 들끓어 독일 국민의 약 80% 이상이 핵발전소에 반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반핵 여론을 통해 급성장한 녹색당은 더 이상 군소정당이 아니라, 향후 연정의 주요한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98년 선거를 통해 사민당과 녹색당의 적록연정이 출범하면서 핵발전소 폐쇄 합의, 재생에너지법(EEG) 제정, 탄소세 도입, 원자력법 개정 등 굵직굵직한 에너지 전환 정책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