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3 KBO 한국시리즈 5차전 kt wiz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6-2로 LG가 승리해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자 LG 팬들이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은 13일 밤이다. 엘지 트윈스가 한국시리즈에서 29년만에 우승을 한 날 밤이다. 경기에서도 8회 말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벌써 시리즈에서 세 번의 승리를 따내고 오늘 경기도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으면서도 선뜻 '이긴다'거나 '우승을 한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그보다는 그런 생각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했다. 우승을 누구보다 바라지만, 누구보다 우승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라니. 그건 마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제대로 고백도 하지 못한 채 끙끙 속앓이만 하던 어느 어린 날 같은 마음이었다. 결국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어느 시절의 어떤 일들. 비단 연애만 그랬을까. 어쩌면 나는 살아오며 대부분의 일에서 실망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 인생에 그렇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오늘 29년 만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고, 나는 지금 무덤덤하지 않다. 대단한 흥분상태다. 실은 며칠 전, 이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엘지팬의 입장에서 2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오른 엘지 트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처음엔 원고에 엘지 트윈스의 못났던 날들을 자조하거나, 결국 우승하지 못하고 팀을 떠난 선수들을 그리워하거나, 또는 오랜 세월 우승도 못 하는 팀의 팬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선 써놨던 초안을 모두 지웠다. 나에게도 특별한 일이 일어났으니까.
이미 지나가 버린 29년 전의 지난 영광이나, 21년 전의 안타까움 말고, 지금의 기쁨과 내년의 기대, 이뤄지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이뤄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 희망 같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비단 이번 원고뿐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쓰고, 말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다짐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난 지금 <지속가능한 엘레발 선언문> 같은 걸 쓰고 있는 셈이다.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는 건 많은 경우 '매우 무용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프로야구 같은 것. 우리는 오늘도 야구에서 배웠다. 내 인생엔 어쩌면 종종 특별한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오래 걸리더라도 바라던 것들은 이뤄질 수 있다는 것. 용기 내 고백하지 않으면 연애는 시작되지 않고, 나아가지 않으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 공은 둥글고 야구는 모른다는 것. 고작 공놀이일 뿐이지만, 그 공놀이 따위에 기뻐하고 슬퍼하던 사람들의 시간이 실은 그토록 거창하게 말하던 '세계'일 수 있다는 것.
조치훈 9단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난 좋아하는 야구만화인 <H2>의 주인공 히로가 한 말을 한두 개 빌려야겠다. "타임아웃이 없는 경기의 즐거움을 가르쳐 드리죠". 그리고 "역시, 야구밖에 없어"
엘지 트윈스의 우승을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한다. 엘지 트윈스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팬들을 더욱 축하한다. 끝끝내 우승 반지를 갖지 못했지만 오늘 분명히 어딘가에서 눈물을 찔끔 흘렸을 그 선수들을 또 축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십 년 전의 영광 따위나 주억거리고, 이십 년 전의 안타까움 따위나 매만지지 않을, 실망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쿨한 척하지 않고 또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을 기쁨을 위해 희망 갖기를 포기하지 않을 모든 야구팬들을 축하한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