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오전 서울 시내 한 은행에 대출 금리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그때나 이때나 내 집 마련을 빚 없이 현금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06년 난 수도권 아파트를 30년 모기지로 분양받았다. 내 어린 시절 기억 대부분을 고통으로 점철한 그 무서운 '빚'을 낸 것이다. 그렇게 난 금단의 사과를 먹었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당시 기준 금리는 4%대였다.
당시 난 이런저런 일로 회사원에서 자영업자로 인생 2막을 열었던 시점이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큰 모험을 한 것이다. 그나마 최초의 사업은 운이 좋았다. 생각보다 장사가 잘돼서 60여만 원만의 이자를 거치 기간 중 꼬박꼬박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원금까지 내야 하는 시점이 도래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원금에 이자까지 매달 은행에 지불해야 하는 돈이 100여만 원에 이른 것이다. 더욱이 변동 금리가 오르며 5%에 진입했다. 이제 우리 가족은 본격적으로 허리띠를 조여야 했다.
첫 번째 장사의 운은 5년 만에 끝났다. 가게 상권 중 일부가 재개발에 들어간 것이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생 3막을 시작했다.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돈이 있었지만 새로운 사업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모자란 금액은 은행 대출을 받아야 했지만 망설여졌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높았던 금리에 부대껴 봤던 난 이번에는 최대한 은행 대출을 받지 않으려고 애썼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무너졌던 국내 부동산 경기는 2011년 막 기지개를 켜던 시점. 서울에 바로 인접한 경기도 모 지역의 전세 시세보다 당시 인천 신도시의 전세 시세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에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 차이가 같은 평수에 1억 원 차이가 날 정도로 상당했다. 난 이 상황을 이용했다.
전세 시세 차이를 이용해 난 인천에서 새로운 외식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난 빚은 최대한 줄여 그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자영업 중 가장 치열하다는 '외식 자영업'이라는 새로운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몰랐다. 지인들은 지금도 가끔 내게 "갭 투자는 장사가 아니라 부동산에 했어야지"라고 핀잔을 준다.
장사가 잘됐다면 그게 농담 같은 핀잔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사업은 그러지 못했다. 전세 시세 차액에 의한 갭투자라 이자와 원금에 대한 부담은 덜했지만, 문제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저금리로 '빚을 내서 집 사라' 정부 정책 기조에 전국적으로 전셋값이 폭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 상황은 내게 더 가혹했다. 인천처럼 시세가 바닥을 찍은 곳의 상승률이 더욱 거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전세 갱신 때마다 수천만 원에서 심지어 1억 원씩 오른 전셋값을 빚으로 메워야 했다. 그조차 깡통 아파트였다. 더욱이 장사마저 안 되는 상황이라 소위 말하는 '마이너스 통장', 즉 고금리 신용대출로 모자란 생활비도 메워야 했다. 그야말로 빚에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빚에 치이며 '난 절대 빚은 지지 않으리라'라는 각오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제는 내가 진 빚에 내 자식들이 치이는 상황이 됐다. 맏이가 대입을 앞두고 학원에 가고 싶어서 했지만, 난 막아야 했다. 둘째가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고 할 때 그것도 난 두 손 들어 막아야 했다. 물론 맞벌이 아내의 처절한 노력으로 둘 모두 우여곡절 끝에 원하는 곳에 진학은 했지만, 난 자식들 마음 속 소리 없는 원망을 들을 수 있었다.
소중한 집을 포기하다
2015년 난 집을 팔았다. 아니 집을 포기해야 했다. 사업을 정리하며 남은 부채를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 모두 영혼을 팔아서라도 장만한다는 아파트를 난 피눈물을 흘리며 포기했다. 이때부터 나는 단기 노동자와 주변 지인들 사업에 참여하는 등 이제 장사가 아닌, 투잡 노동자로 돈을 벌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내게 남은 부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가족은 매주 간단한 외식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다 보니 교육비로 생계는 여전히 빠듯했지만, 난 정말 오랜만에 정신적 평화를 찾았다.
그런데 이 평화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전셋값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다고 2018년 이번에는 아버지의 빚보증 문제까지 터졌다. 30여 년을 거주한 부모님의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어린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던 그 빨간 딱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2022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채 정리하지 못한 부채가 내게 남겨졌다. 상속을 포기하면 될 일이지만, 내가 포기하면 아버지의 친사촌은 물론 내가 알지도 못하는 외사촌 어른들에까지 부채가 돌아간다고 한다. 팔순 전후일 그 어르신들에게 못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