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완도신문
충무공 이순신의 표준 영정이 논란거리다. 고금도 충무사의 이순신 영정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순신의 모습은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으로 1973년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했고,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됐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심전 안중식이 1918년 그린 것인데,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두 그림은 모두 작가의 상상화다.
그동안 100원짜리 동전속의 이순신은 논란거리였다. 불패의 장수 모습이 선비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평가를 친구인 서애 유성룡은 '단아하고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고 징비록에 기록했다. 그의 기록이 상투적이라고 말하는 연구자가 많았어도 그것을 토대로 그려졌다. 대다수 국민에게 영정은 이순신의 본모습처럼 각인됐다.
월전 장우성의 후손이 이순신 영정 반환과 한국은행을 상대로 저작권료 요구 소송을 냈다. 월전이 친일화가라며 국가가 화폐교체를 의논하려고 해서 유족 측이 반발한 것이다. 최근 법원의 판결은 유족 측의 패소로 이어졌다. 이순신의 영정을 두고 다시 논란이 불거질 조짐이 보인다.
조선은 유교국가다. 조상을 섬기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다. 신위를 모시고, 왕을 비롯한 국가에 공을 세운 신하는 당연히 초상화를 필요로 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신분에 상관없이 보이는 그대로를 극사실주의로 표현했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걸작으로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심환지(보물 제1480호)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제240호)을 꼽는다. 완도군 신지도에 유배 와서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초상화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미인도를 남긴 조선의 화원 신윤복의 아버지이며, 정조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 신한평이 유배중인 원교를 찾아와 그림을 남겼다. 원교의 초상화는 신한평이 그린 것 중 유일하게 남아 있어서 더 값지게 여긴다고.
조선시대 초상화에는 검버섯이나 곰보자국까지 뚜렷하다. '부모의 초상화를 그릴 때 털 끝 하나라도 같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통영 이순신 사당에 걸려있는 이순신 영정은 국가 표준 영정과는 사뭇 다르다. 착량묘사당에 봉안된 영정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있었다는 주장이다.
해남군은 1964년 문내면 학동리에 세워진 충무사를 역사적 고증을 통해 지난 2017년 문내면 동외리로 옮겨 복원했다. 이전에는 충무공 영정을 도난당해 새로운 영정을 제작하기도 했다. 우수영 일대를 명량대첩의 성지로 가꾸기 위한 자치단체의 노력이 눈물겹다. 모두가 행정의 의지에서 비롯했다.
전국에는 이순신 동상이 꽤 있다. 한때 초등학교 교정에는 의례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다. 이순신 동상 중에 대표적인 것이 광화문 광장, 유달산 초입, 진도 녹진 등지에 있는데, 모두가 각기 다른 모습이다. 하나 같이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