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심할 때 '연애'를 했는데 그들은 심심할 때 연애보다 훨씬 재밌는 일이 많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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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남여 주인공을 서로 호감을 느끼게, 가치관도 비슷하게, 말도 통하게 만들어 놓고는 정작 1미터30센티미터 정도의 거리를 절대 유지시키는 거다. 유부녀 편집자가 보기엔 저 정도면 썸을 넘어 연애를 하고도 남을 에피소드에서도 절대 거리 유지. 이정도면 '개연성' 부족 아닌가 싶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작가에게 수정을 제안하기 전에 출판사 내 20, 30대 남여를 붙잡고 회의를 시작했다. 도대체 이 둘, 왜 썸을 안 타는 거냐고. 나로선 '헉' 할 만한 정말 흥미로운 대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째 '귀찮다'. 둘째 '핸드폰으로 보고 즐길 게 너무 많다'. 셋째 '연애는 나만 손해보는 관계 같아서 싫다'. 넷째 '여자가 예쁘냐?'. 다섯째 '이미 청명과 연애 중이다'. 여기서 '청명'은 유명한 웹소설 <화산귀환>의 남주 이름이다.
'청명' 생일이 10월달이었는데 BTS 생일잔치 저리가라 싶게 홍대 카페에서 '생파'도 열렸단다. 울 여직원은 선착순에 밀려 못 가봤단다. 그걸 울상을 하고 말하는데, 회의를 여기서 끝내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됐다.
그나저나 처음엔 농담처럼 들렸던 그들의 진심을 한 시간째 듣고 있자니 소설 속 주인공이든 현실 속 우리 직원들이든 그들이 썸을 안 타는 이유가 점차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심심할 때 '연애'를 했는데 그들은 심심할 때 연애보다 훨씬 재밌는 일이 많아 보였다.
나는 사랑을 느끼고 싶어 사람과 연애를 했는데 그들은 웹소설 주인공을 덕질하는 일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랑하는 관계라면 희생과 행복이, 또는 갈등과 화해가 50:50으로 동일하게 일어나는 게 정상이라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희생도 갈등도 겪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다 스트레스라고 느끼는 것 같았고, 희생은 불행을 불러오고 갈등은 싸움을 일으킨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험치는 일천하고 거의 다 SNS와 미디어에서 들은 얘기였다.
갈등 없는 화해는 팥 없는 단팥빵처럼 밋밋한 맛이라고, 희생 없이 받기만 하는 사랑은 쫄쫄 굶어서 살을 뺀 다이어트처럼 잠깐은 좋겠지만 금세 요요가 찾아올 거라고, 아니 그보다 더 찰진 비유를 들어 찰떡같이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서만이라도 핸드폰을 잠시 거두고 싶었다. 삼랑진을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마법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싶었다. 썸이든 연애든 결혼이든, 직접 해보고 아파보고 다시 일어서서 찐사랑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남의 연애사를 들을 수 없는 법이라도 만들고 싶었다.
소설에서 개연성을 어떻게 보충해야 하는지 답은 나온 것 같았다. 관계에 지쳐 삼랑진에 내려온 이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연애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스트레스 없이 행복한 일, 즉 소설 쓰기나 마을 돌보기 같은 일에 몰입 중인 자신에게 만족하는 설정을 입혀주면 나 같은 결혼한 독자들에게도 이해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의를 끝내기 전에 아쉬움에 한 마디 남겼다.
"연애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좋은 이야기는 남한테 안 해요. 싸우고 헤어진 이야기만 하지. 여러분은 반쪽짜리 연애사만 듣고 지금 연애가 피곤하다고 안 하고 있는 거야. 진짜 억울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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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호기심 많은, 책 만드는 편집자입니다. 소심한 편집자로 평생 사는가 싶었는데, 탁구를 사랑해 탁구 선수와 결혼했다가 탁구로 세상을 새로 배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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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회의에서 나온 질문 "왜 썸을 안 타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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