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학살지 산173 발굴함 ② 발굴한 산72 ③ 백갑흠의 학살지 산73 이곳은 과수원으로 개발돼 유해는 훼손된 상태.
김영희
아버지는 보도연맹원에 미가입자인데 왜 잡혀갔을까?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직접 가입하지 않았어요. 잡혀간 사연은 따로 있어요. 동네 이장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논이 위아래로 있었는데, 가뭄이 오거나 모내기를 할 때 물로 다툼이 허다했대요.
당시 모내기 철이라 논에 물을 대주지 않는다고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고, 결국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냈나 봐요. 감정의 골이 상당히 깊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이장이 아버지에게 도장이 필요하다고 해 줬더니 '보도연맹 가입 서류'에 도장을 찍어버린 겁니다."
이웃 간에 서로의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본인의 허락도 없이 도장을 함부로 사용한 이장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학살지로 갈 때 억울하다고 소리 지른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저씨,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골짜기를 찾아갔다.
관지리 학살지는 붉은 피로 물들어 난장판이 되었다. 계곡을 타고 핏빛 물이 시냇물처럼 흘렀다. 할아버지는 시신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냄새와 악취, 파리 떼로 인하여 숨도 쉴 수가 없는 상태에서 낯익은 벨트 하나가 시신 틈새로 드러났다. 아버지는 평소 제부의 벨트가 좋아 보인다며 빌려 차곤 했다. 마침 그 벨트가 할머니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이고! 저 벨트 우리 아들 벨트다."
아버지는 얼마나 소리를 치고 발버둥을 쳤던지 머리에 총을 너무 많이 맞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저씨가 바지게에 시신을 담아지고 20km를 걸어서 집에 도착하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집 뒷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필자는 딸 백자야, 사촌 동생과 함께 고인의 묘지를 찾아갔다. 71년이 지난 무덤은 잔디 하나 없이 벌거벗은 상태로, 긴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한편 시신이라도 찾아서 자식한테 참배라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유족들의 대부분은 피학살자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자야는 아버지 산소 가는 길이 험하고 연세도 있어 추석에도 찾아뵙지 못했는데, 필자 덕분에 찾아뵐 수 있어서 다행이고 고맙다고 했다. 진주지역에서 시신을 찾은 유족의 첫 사례라 꼭 한번 뵙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