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공원 주요한 시비
김종훈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 옆에 자리한 주요한 시비에는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라고 시작되는 1923년 주요한이 쓴 <빗소리>가 새겨졌다.
스물셋에 청년이었던 주요한이 중국에서 활동하며 한자어를 배제하고 순수한 우리말의 율감을 살려 밝고 서정적으로 빗소리에 의탁해 조국 해방의 꿈을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시다.
그러나 한글을 사랑하고 조국 해방을 꿈꿨던 청년의 모습은 십여 년 뒤 수양동우회사건을 거치며 바뀐다. 종로경찰서에 검거된 뒤 그는 전향을 선언했고 조선신궁 참배를 시작으로 누구보다 적극적인 친일 인사로 변모한다.
구체적으로 1938년 12월 열린 시국유지원탁회의에서 주요한은 "이 비상시에 있어서는 우리는 일본이 승리를 얻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황군의 필승을 위한 총후의 적성에 전력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어 일제에 국방헌금 4000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즈음 서울 중급 한옥 1칸이 980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1940년대 들어 주요한은 국민훈련후원회 등 친일단체에 발을 담그며 본격적으로 일본어보급운동에도 참여한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41년 8월에는 전쟁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 결성식에 참여해 준비위원으로 선출됐다. 이후엔 공개장소에서 "무적황군의 일분자가 됨을 욕되게 아니하려면 국체에 철저하고, 충절을 다하며, 사생을 초월하고, 곤고(困苦)를 견디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주요한은 1944년경 친일파 박흥식이 이끄는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 공장을 짓는 데 관여해 해방될 때까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진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과 언론뿐 아니라 군수분야에서도 일제의 침략에 직접 기여코자 한 것이다.
하지만 광복 후 우리 사회는 주요한이 1979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못했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창립된 후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흥식, 이광수, 최린, 최남선, 노덕술 등과 함께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됐지만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방해 공작으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주요한은 오히려 사망 직후인 1979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1993년에는 급기야 서울시가 직접 관리하는 세종로공원 중앙에 주요한의 '빗소리가' 새겨진 시비가 설치됐다. 시비 하단엔 "그가 평생 지낸 당주동과 사직동에 접한 세종로공원에 유족 최OO 여사, 4남 4녀와 그를 따르던 이들이 뜻을 모아 14주기에 맞춰 시비를 세웠다"라고 적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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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 옆 친일파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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