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제7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 서지 않은 지 1년이 넘었다. 지난해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 윤 대통령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이었다. 윤 대통령이 "제가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밝혔던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도 진작에 중단됐다. 앞으로 기자회견이나 출근길 문답이 되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대신 윤 대통령이 택한 것은 국무회의에서의 '독백'이다.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을 대국민 성명처럼 읽는다. 국정의 근간인 여론 정치는 실종되고 대통령의 일방적인 생각과 지시만이 넘쳐난다. 국민의 궁금증을 대신할 기자들의 질문이 차단된 현실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하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과 그로 인한 정권의 폭주다. 윤 대통령에게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데는 이런 '불통'의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다.
역대 대통령도 늘 듣던 '제왕적 대통령'이란 비판을 윤 대통령이 집권 1년여 만에 벌써 듣게 된 것은 국정 운영의 독단적 태도가 그만큼 강해서다. 국정 운영과 정책 결정, 인사 등에서 삼권분립을 뛰어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많다. 제왕적 대통령의 가장 강한 징표는 의회와 야당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에서 나타난다.
시행령 통치, 인사 강행, 거부권·사면권 남발... 역대급 '제왕스러움'
대표적인 게 시행령 개정을 통해 국회에서 제정한 법을 우회하는 이른바 '시행령 통치'다. 시행령은 어떤 법률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세부 규정을 담은 것으로, 헌법이나 법률처럼 상위의 법을 위반하는 내용을 시행령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국정의 원활한 운영'을 이유로 국회를 통하지 않고 시행령으로 법을 무력화하려는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경우 현재의 여소야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시행령 통치를 남발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가령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 복원)' 시행령은 헌법재판소가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에 대해 적법하다고 판단한 상황에서 논란의 소지가 큰데도 강행했다. KBS 시청료 분리 징수 문제도 사안의 중대성을 보면 국회 논의를 거쳐야 하는데 적절한 심의 없이 시행령으로 밀어붙였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이후 역대 정부가 추진·공포한 대통령령을 보면 출범 1년간 이명박 정부는 609건, 박근혜 정부는 653건, 문재인 정부는 660건이었지만, 윤석열 정부는 현재까지 809건이다.
대통령 권한의 크기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는 '국회 동의 없는 장관급 인사 임명 강행'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1년 3개월 만에 벌써 16명의 장관급 인사들을 국회의 동의 없이 임명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각각 10명과 17명으로 집계됐다. 문재인 정부 때는 임명 강행 사례가 31명으로 최다를 기록했지만, 취임 후 1년 3개월을 기준으로는 5명에 불과했다.
윤 대통령은 여당이 국회에서 소수당임에도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에 협력을 구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여야 대립으로 인한 국정 혼란의 책임은 집권 여당에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제1야당 대표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중요한 정책을 추진하려면 법안 통과가 시급한데 야당에 도움을 요청하기는커녕 비난과 공격에 앞장서는 모습이다. 야당을 반국가세력으로 칭하는 데서 아예 협치를 포기한 듯한 태도가 읽힌다.
국회에서 통과한 법안에 대해 자주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는 것도 국회 무시의 한 형태다. 윤 대통령은 현재까지 양곡관리법과 간호법 등 2건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1건, 박근혜 대통령은 2건이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단 1건의 거부권 행사도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역대 정부보다 거부권 행사 횟수가 많은 셈인데, 윤 대통령은 야당이 추진 중인 노란봉투법과 방송법 개정안, '채 상병 사망 사건' 진상규명 특검법 등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방침이어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의 제왕적 국정 운영은 사법부 판결을 부정하는 데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8·15 광복절 특사로 김태우 전 서울 강서구청장을 사면한 게 단적인 예다. 윤 대통령은 김 전 구청장이 공익신고자라는 이유로 사면했다지만, 법원은 그의 행위를 공익신고가 아닌 "범행 동기가 좋지 않은" 범죄라고 판결했다. 아무리 사면이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지만 대놓고 법원 판결을 무시하는 것은 이전 대통령에게서 보기 어려웠다.
윤 대통령은 취임 1년여 만에 벌써 세 차례나 사면권을 행사했다. 이명박 대통령 7회,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6회, 박근혜 대통령 3회와 비교했을 때 재임 기간에 비해 횟수가 많다.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비판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사면 횟수 5회를 넘어설 가능성도 크다. 대통령 특별사면은 헌법에 보장된 통치행위이지만 최대한 절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의 사면권 남발은 법치를 무너뜨린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전근대 시대 군주와 가까운 윤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은 제도적 요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적 현안과 주요 정책 곳곳에도 윤 대통령의 독단적인 의사가 깊숙이 개입돼 있다. 여전히 논란이 가시지 않은 대통령실 용산 이전은 대다수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이 강력히 주장해 관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 이전이라는 국가 중대사를 밀실에서 결정하고 불과 두 달 만에 해치운 것에 납득하지 못하는 국민이 아직도 많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변제 방식도 외교라인에서 서두르지 말 것을 건의했으나 윤 대통령이 밀어붙였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한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다수의 국민도 과거사 문제를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윤 대통령의 결정은 수긍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행태는 일본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정부의 저자세로 이어졌다. "내가 결정했으니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제왕적 인식과 뭐가 다른지 많은 국민이 의문을 갖고 있다.
윤 대통령의 '제왕스러움'은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언어에서도 감지된다. 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준동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놓고 이념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윤 대통령 인식의 종착점은 철 지난 반공 이데올로기이다. 1970년대 반공주의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뜬금없이 시작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도 맹목적 반공 이념에서 비롯됐다.
대통령 개인의 문제일까, 정치 구조의 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