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와인과 추석 밥상나물, 전, 송편 등과 특별히 거슬리는 것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임승수
오잉? 굉장히 반갑고 아련한 의외의 향이 후강을 가득 채운다. 소싯적 청포도 알을 떼어내 손에 즙을 묻혀가며 먹을 때 코에서 감돌던 바로 그 냄새다. 명명백백한 청포도 향이 강하게 응축되어 강렬하게 폐부로 들어오는데, 그 순간 큼직한 청포도 사탕이 떠올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향이다.
그동안 수많은 화이트와인을 마셔봤지만, 토종 한국인에게 이렇게나 강렬한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한 녀석은 처음이다. 와인이라는 이국적 형식의 음식에서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가 감지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헛웃음 비슷한 웃음이 나왔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농가에선 외면, 양조장에선 환영
식탁 건너편에서 한 모금 마시던 아내가 불쑥 말을 건넨다.
"예전에 마셨던 국산 레드와인보다 훨씬 낫네."
"기대 이상이야. 상당히 괜찮네."
"향기만 맡아서는 달콤한 느낌인데 입에서는 단맛이 하나도 없어. 코와 입에서 각각 느낌이 완전히 달라서 흥미롭네."
"옛날에 먹던 큰 눈깔사탕있잖아. 청포도 맛 나는 것 말이야. 그 향이 나니까 참 재밌어. 근데 인공적인 느낌이 아니고 자연스러워."
"코에서는 향기가 화려화려 달콤달콤한데, 입에서는 한 나라의 공주에게서 느껴질 법한 기품있고 도도한 차가움이 느껴져."
아내의 표현처럼 입에서는 차분한 느낌이 강하다. 그렇다고 심심하거나 재미없는 게 아니라 단아한 차분함이랄까. 적당하게 기분 좋은 신맛에 밸런스도 좋고 음식과의 궁합도 무난하다.
눈이 확 떠지는 시너지가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나물, 전, 송편 등과도 특별히 거슬리는 것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일부러 김치를 먹고 나서 마셨는데도 별다른 위화감이 없다. 그냥 집밥 먹으면서 반주로 마셔도 괜찮겠다 싶은 정도다.
이렇게 느낌이 좋다 보니 청수라는 품종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원래는 씨 없는 식용 청포도를 만들기 위해 농촌진흥청이 육종한 포도란다. 식감도 좋고 향도 강하며 추위에도 잘 견디고 열매도 잘 맺혀서 장점이 많았다.
하지만 수확기에 포도알 떨어짐 현상이 너무 심해서 상품성이 떨어져서 농가에서 외면 받았는데, 양조용으로 사용되면서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어쩐지 기존 와인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식용포도의 향기가 강하게 감지된다 했더니 그러한 사연이 있었구나. 이 와인을 마시며 '네가 여기서 왜 나와!'라는 느낌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추석 밥상의 민족적 형식을 헤치지 않는 동시에 굳이 애국심에 기대지 않고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외국 와인의 아류가 아닌 한국 와인만의 개성을 갖고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것 참 제대로구나. 우야튼 술 있는 한가위만큼은, 위 증즐가 대평성대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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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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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 전, 송편, 김치랑 먹어도 괜찮은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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