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입구의 화장실과 주차장 새이름, ‘비움터’와 ‘차쉼터’ 진관사 입구의 화장실과 주차장 새이름, ‘비움터’와 ‘차쉼터’ @김슬옹
김슬옹
- 진관동의 우리말 사업 추진 배경을 간단하게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실까요?
김병무 회장 : "우리 진관동은 한문화 전당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관사의 한식과 한옥마을, 한문화 체험관 등이 있습니다. 특히 세종 시대에 진관사의 사가독서당이 운영이 됐고 그 사가독서당의 학자들이 한글과 연관된 역할을 하신 역사적 유래가 있지 않습니까?
사가독서는 관리가 집에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제도입니다. 처음에는 각자의 집에서 책을 읽었으나 독서에 전념하기 어렵다 하여 세종 24년(1442)부터는 진관사에서 책을 읽게 했지요.
한글 창제 1년 전인 1442년에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 등 여섯 명이 진관사에서 처음 사가독서를 했습니다. 1442년은 훈민정음 창제 공표(1443) 1년 전이고, 해례본 간행(1446년) 4년 전입니다. 여섯 명 가운데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등 네 명은 해례본 저술과 반포에 큰 공로를 남긴 훈민정음 반포 1등 공신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진관동에는 국립한국문학관이 11월에 착공을 앞두고 있고 그 밑에 예술인 마을이, 그 옆에는 한국고전번역원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글 관련 역사성을 살려 우리 진관동에서 순우리말과 한글을 활용한 사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인사동이나 세종시에서는 한글로 표기된 간판은 있지만, 순우리말을 적극적으로 살려 쓴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진관동에서 한글만 아니라 순우리말도 빛내자고 주민들이 뜻을 모은 것이죠."
필자가 진관사에 여러 차례 가보니 사찰 안 큰법당 앞쪽 관련 안내판에 진관사가 조선 시대 한글 창제를 위해 사용되었던 비밀연구소인 독서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글 창제를 위한 비밀연구소라 한 것은 창제 1년 전 사가독서를 진관사에서 했고 사가독서에 참여한 중심 인재들이 한글 반포를 위한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 저술, 관련 서책 연구와 저술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글 창제 과정 자체가 비밀이었으므로 이런 추론을 한 것이다. 물론 진관사 독서당에서 집현전 학사들이 어떤 연구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