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뿌리에서 다발로 자라난 팔현습지 왕버들숲의 한 왕버들 앞에서 수녀님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너무 아름다워요. 이런 곳이 대구에 아직 남아있다니 너무 놀라워요."
"대구 도심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요."
"어려서 이 부근에서 살았는데 아직 이런 곳이 있다니 정말 신기해요."
영천댐에서 탁수가 흘러나오는 영향으로 이곳 강물이 완전히 맑은 강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산업화 시절의 금호강 모습에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동행한 수녀들이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은 이유다. 수양버들과 왕버들이 적당하게 썩인 이 하천숲은 마치 금호강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오동필 단장은 어느새 큼지막한 조개의 폐각들을 주워들고 나타난다. 그러고는 강물 속에서 다슬기와 고동을 발견해낸다. 이들은 금호강 하천바닥인 저서생태계가 완벽히 부활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조개의 폐각은 '대칭이'라 불리는 녀석이고, 다슬기는 '주름다슬기'로 다른 곳의 다슬기와는 조금 다른 우리나라 고유종이다.
완벽한 습지의 형태를 보여주는 이 하천숲이 끝이 나면 나타나는 작은 산 제봉의 절벽, 즉 하식애(河蝕崖) 지형인 이곳에 멸종위기종 수리부엉이가 산다. 그리고 그 앞으로 넓은 초지가 펼쳐지고 초지를 따라 더 내려가면 팔현습지에서도 가장 자연성이 살아있는 곳인 왕버들숲이 나타난다.
<한국식물생태보감>의 저자 김종원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은 특히 멸종위기 야생생물이 인간 개발 등을 피해 마지막으로 머물 수 있는 피난처인데, 생태학적 용어로는 '숨은서식처(cryptic habitat)'라 한다. "이런 숨은서식처가 사라지면 멸종위기종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왕버들숲에 수리부엉이가 나타나고 깊은 산골에서나 목격되는 담비가 나타나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곳이 마지막 남은 숨은서식처여서 아닐까.
이곳 왕버들의 특징은 가지를 다발로 뻗어서 자라났다는 점이다. 한 나무가 여러 다발의 줄기로 자라난 것으로 그 둘레를 모두 합치면 어떤 것은 10여 미터에 이른다. 수령이 최소 100년은 넘은 녀석들로 이곳 팔현습지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체다.
고라니들의 놀이터로 이용된 왕버들이 있는가 하면 수리부엉이 유조의 휴식처 역할을 하는 왕버들도 있고, 누워서 자라는 왕버들도 있다. 각양각색의 왕버들 10여 그루가 다발로 자라나 마치 수십 그루의 효과를 나타낸다.
이곳에서 지난 8월 1일 담비를 만났다. 그래서인지 이날 담비에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라니 새끼의 뼈도 발견됐다. 두개골과 갈비뼈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으로 이곳이 야생의 세계에 가깝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수녀들과 필자가 고라니 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오동필 단장은 하식애 절벽에서 인간의 흔적을 발견해낸다. 바위에 새겨진 1950년 8월 15일을 뜻하는 숫자와 사람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다.
1950년이면 한국전쟁 당시인데, 이곳에 머물던 군인이 새긴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들이 오고가면서 이곳 팔현습지의 역사에 대해서도 궁금즘이 생기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흔적과 야생의 흔적이 동시에 목격되는 곳.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라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인간의 접근이 거의 허용되는 곳이 아니다. 이곳을 아는 극소수의 이들만 이곳을 찾아 들어올 뿐 철저히 고립된 생태계로 야생의 세계에 훨씬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