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
안치용
나무는 생명이지만, 죽은 나무는 물질이다. 수종이 무엇인지 확인되지 않는 Y자 모양의 나무토막은 잘림으로써 바로 그 순간에 하나의 물체가 된다. Y자는 위에, 그 벌어짐의 중간에 돌을 얹은 채 직립한다. 직립한 다음에 돌을 인 나무가 되었겠지만, 나무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돌이 그곳에 내려앉았는지, 아니면 나무가 돌을 이고 선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판단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나무로 된 탁자 위에서 질감이 다른 두 물체가 어우러져 균형을 유지하며 존재를 제시한다.
거기로 조명이 쏟아져 발아래 검은 그림자가 뚜렷하다. 존재는 직립하고 그 그림자는 하강한다. 전시물을 지지하는 탁자, 나무로 보이는 Y자는 바이오매스(biomass)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후자는 배우이고 전자가 무대라는 게 차이이다. 폐목과 목재라는 인간 중심의 구분법을 적용할 수도 있다. 배우 역할을 하는 직립 바이오매스 Y가 진 돌덩이는, 폐목의 두 팔 사이에서 숨은 듯 자는 듯 풍경에 긴장을 형성한다.
이 전시물은 당연히 전시물 자체로 감상할 수 있고, 감상하면 된다. 그때는 관람객 숫자만큼 다양한 반응과 해석이 나올 것이다. 김범 작가는 이 전시물에다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이제 유기물(나무토막)과 무기물(돌)로 구성된 비(非)생명체는 생명을 부여받는다. 돌은 새가 되어야 하고, 언급되지 않은 폐목은 새가 깃든, 그러므로 살아있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돌이 새가 됨으로써 나무는 다시 생명을 획득한다.
이러한 명명으로 역전이 일어난다. 과거에 분명 생명이었던 Y라는 유기물은, 새롭게 비상하려는 무기물을 보좌하여 생명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무대를 꽉 채우지만, 한없이 투명해진다. Y가 제목에서 소거되었기 때문이다. 자상한 관객은, 네가 없었다면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의 형상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란 위로를 Y에게 건넬 법하다.
중력에 굴복해야 하는 만만한 무엇에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중력의 지배를 꽤 덜어내 가장 큰 비약을 성취한 돌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굳이 흠을 잡자면 존재 규정이 수동태라는 것과 함께 존재가 여전히 미확정 상황이라는 걸 들 수 있다. 결정적으로, 돌은 자신이 새라고 배웠을 뿐 여전히 새가 아니다. "새라고 생각하는" 식으로 만일 수동태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우격다짐으로 돌파하는 존재의 틈새를 모색할 수 있었으련만, 그에게 이 전시에서 돌파는 없다.
세 가지 질감과 그 아래 인위적 질감까지 포함해 이 조형물에서 인간 실존의 투사를 엿본다. 실존주의의 실존은 최대 긍정 속에서도 수동태에 머문다. 의미 있는 비약은 비상하지 못한다. 마침내 다시 중력에 굴복하고 말 돌의 수동태의 슬픔과 돌의 (실현되지 않은) 비상을 추앙하였지만 전혀 호명되지 못한 Y의 소외는, 이 조형물의 조형과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이란 명명을 통해서 도저해진다.
독특한 작품들, 진지함이 참신함의 동기가 된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