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 사진은 2011년 11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할 당시 모습.
남소연
마침내 <노회찬 평전>이 나왔다. 이광호 작가는 4년의 땀을 이 한 권의 책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221명의 구술을 받아 집필하였다고 한다. 예삿일이 아니다.
<노회찬 평전> 출간 기념회가 열렸다. 나더러 노회찬의 회고사를 해달란다. 나는 망설였다. 그는 지금 한창 일할 사람이지 그의 과거사를 회고할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회고할 이야기도 없었다. 모인 분들에게 들려주면 좋을, 노회찬의 숨은 일화가 많지 않았다. 노회찬은 공적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삼겹살 불판" 이야기, "도둑놈을 잡으라고 신고하니 도둑놈은 잡지 않고 신고한 사람을 잡아가는 세상"이라고 꼬집던 이야기, 다 아는 이야기다.
'진보정치' 암벽 등반의 선봉
그래도 주최 측의 요청을 묵살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30여 년 동안 노회찬과 한솥밥을 먹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1986년 5.3 인천항쟁 이후 정국은 가파르게 치닫고 있었다. 전두환은 우리를 좌경 과격 집단으로 매도하였고, 나와 같은 수배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경찰들이 영장도 없이 자취방의 열쇠를 따고 방을 수색하는 살벌한 시절이었다. 치안본부장이 전국의 경찰서장을 모아놓고 해당 수배자를 잡지 못하면 옷을 벗으라고 협박하던 시절이었다.
역사의 격랑을 헤쳐 나가기 위해 우리는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맺었다. 강령을 놓고 우리는 진지하게 토론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아일보> 1면 맨 밑 휴지통이었을 것이다. 서울대생이 고문 중에 사망했다는 기사가 떴다. 바로 그날 우리는 비상시국임을 직감하고, 행동에 돌입하였다. '살인 강간 고문 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작성하였고, 부천역 앞 대중집회를 기획하였다. 집회의 주체를 '살인 강간 고문 정권 타도를 위한 투쟁위원회'로 정했고 약칭 '타투'라고 불렀다.
이후 1987년 2월에서 6월까지 '타투'는 6월항쟁의 선봉에 섰다. 여세를 몰아 우리는 1987년 6월 26일, 부평역 앞 광장에서 수천 명의 시민 앞에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창립하였다. 항쟁의 한복판에서, 미 제국주의의 간섭을 물리치고, 독점자본의 수탈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군사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자고 우리는 당당히 선포하였다.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해고되고, 또 싸우고, 수배되어 쫓기고, 그러다 감옥에 가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민중의 정치세력화는 힘들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정치였다.
1987년 12월, 민중후보 백기완 선생과 함께 민중의 정치세력화 길에 뛰어들었다. 진보정당의 건설 과정은 끊임없는 선거의 대응 과정이었다. 그런데 준비운동도 하지 않고 시합에 나가니 판판이 깨지는 것이다. 2%의 지지를 넘지 못하였다.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군부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었고, 반공주의가 횡행하는 이곳에서 유럽의 사회당과 같은 진보정당을 만들자고 하니, 이거 신기루를 좇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진보정치의 산을 오르는 암벽 등반을 하였다. 암벽 등반의 선봉을 맡은 이가 노회찬이었다. 나무뿌리를 잡고 올랐다. 천 길 절벽을 타고 기어올라 우리는 마침내 정상에 올라섰다.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하였다.
나의 '차가운 이성'과 노회찬의 '뜨거운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