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2030년까지 40%의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 3번이나 핵시설을 막아낸 삼척 시민들은 다시 '탈석탄' 피켓을 들었다.
이옥분
비록 석탄 육로 수송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지만, 삼척석탄화력반대투쟁위원회(이하 석탄반투위) 주민들과 옥분씨는 분루를 삼키고 다시 다짐한다.
"끝까지 싸워 반드시 막아낼 겁니다."
삼척 시민들이 누구던가? 1980년대부터 핵발전소, 핵폐기장을 3번이나 막아낸 탈핵 운동의 전설들이 아닌가?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을 기록하고 '삼척평화'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삼척 시민들의 투쟁을 알려온 옥분씨의 이번 다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삼척평화' 옥분 씨
"열차 타고 동해항에서 내려서 삼척 오는 버스 타고 삼척우체국 앞에서 내리면 돼요. 참 왼편에 앉아서 정동진 바다를 보면서 오다 보면 다음이 동해역이에요."
전화 너머 들려오는 옥분씨 목소리에 작고 예쁜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를 품은 옥분씨 집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어느 해던가?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 훌쩍 서울을 떠나 도착한 옥분씨 집에서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바닷소리를 들었다. '바다멍'이었다.
옥분씨가 해주는 밥이며, 안주에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온몸과 마음을 녹여냈던 기억은 수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바닷가 옥분씨 집은 수없이 오갔을 탈핵하는 사람들의 쉼표이고 상징이었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마을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후쿠시마 바다가 생각나서 미치겠더라고요."
옥분씨는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삼척 상황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하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핵발전소가 들어오면 일자리가 생긴다는 거짓말을 삼척 젊은이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알리고 싶었다. 불면의 밤을 뒤척이다 새벽 3시쯤 이제 막 시작한 SNS 페이스북이 떠오른 옥분씨는 당장 '삼척평화' 계정을 하나 더 만들었다.
"핵발전소로 삼척의 평화가 깨지고 있으니 다시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담았죠."
2019년 삼척핵발전소 백지화로 세 번째 승리를 일군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이하 핵반투위) 사람들은 또다시 피켓과 깃발을 챙겨 석탄발전소 반대 운동을 이어간다.
핵시설을 막아 낸 힘을 다시 그러모아 석탄화력발전소를 막기 위한 조직을 어렵사리 꾸려야 하는 상황에서 옥분씨는 2021년 초 큰 수술까지 받았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온통 신경은 '삼척 석탄화력발전소 반대' 운동에 가 있었다.
"하루는 담당 의사를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나 이때다 싶어 페이스북 '삼척평화' 계정을 알려주며 탈핵과 탈석탄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죠.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다음날 회진 온 담당 의사는 "이옥분씨가 우리 사회를 위해 애쓰는 동안 나는 병원에서 일만 했으니 옥분씨가 잘 치료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라고 답했단다.누구든, 어디든 탈핵과 탈석탄에 대해 이해시키는 친화력과 대중성은 옥분씨 힘의 원천이다.
정동진 바다를 보고 동해역에 내려 21-1번 버스를 타고 삼척우체국 앞에서 내려 5년 만에 옥분씨를 만났다. 걱정했던 것보다 씩씩하고 여전히 살가웠다.
원전 백지화 기념탑
이명박 정권 시절 2010년 12월 당시 김대수 삼척시장은 주민투표를 통한 주민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삼척핵발전소 유치를 신청했다. 삼척은 1982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핵발전소 예정 구역으로 일방적으로 지정되었다. 1992년 핵발전소 예정지였던 근덕면에 핵발전소를 건설하겠다고 정부가 발표하자 아기와 병석에 누운 노인들만 빼고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6년 동안 끈질긴 투쟁을 이어갔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1998년 12월 30일 '삼척핵발전소 예정 구역 고시 해제'를 발표했고 삼척 반핵 운동사의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되었다. 그 당시 조성한 근덕면 덕산리 8.29 기념공원에는 우람한 '원전 백지화 기념탑'이 삼척 반핵운동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