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신문
묘당도는 언제 생겨난 지명일까? 노량해전 당시 고금도진에 월송대는 존재했을까?
이순신이 적탄을 맞고 전사한 전남 완도군 고금면 고금도 월송대에 80여 일 동안 시신이 안치되었다는데, 사실일까? 완도군이 역사적 고증을 통해 정유재란 당시 고금도의 상황을 재정비하는 의미 있는 행사를 진행했다.
'완도 고금도 삼도수군통제영과 통제사 이순신' 학술행사가 지난 14일 고금면사무소에서 개최됐다. 이순신은 정유재란 시기인 1598년 2월 17일 고금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수군을 정비했고, 7월 16일 진린과 명나라 수군과 최초로 조명 연합 수군을 결성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은 고금도에서 연합군을 결성한 후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승리를 이끌고 7년 전쟁을 마무리한 역사적 현장에 완도 이순신 기념관이 건립된 것.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에 지난 4월 28일 개관한 완도 이순신 기념관은 이순신 장군의 고금도에서 활동을 재조명하는 조명 연합 수군의 의미와 활동에 대한 특별전도 전시했다.
하삼도(下三道).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아울러 하삼도라고 부른다. 조선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지금의 해군 참모총장에 해당하며, 하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이다.
권한 자체는 하삼도 수군이지만, 조선의 주적인 왜를 방어하는 군대이기에 조선 수군 전체나 마찬가지다.1593년(선조 26년) 8월, 왜의 대륙침략으로 점령당한 평양과 한성을 수복한 이후 조정에서는 왜의 해상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조선 수군에 수군통제사라는 새로운 직제를 만들었다. 초대 수군통제사에는 전라 좌도의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을 임명했다.
이는 전 수군을 통솔할 지휘관이 없어 왜적의 침입에 즉각 대처할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했고, 연합 함대를 구성한 후에도 각도 수사(水使)가 도별로 선단을 지휘하는데, 선단 간의 의견이 상충하여 효과적으로 전국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에게 수사 이하 지휘관들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때 군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지휘권이 부여된 것이다.
월송대의 이순신, 검증과 고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