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찾기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입양인들의 가슴 아픈 사례들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인의 부모 등 정보를 포함한 출생의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나'라는 정체성 형성에 소요되는 엄청난 혼란과 스트레스를 겪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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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출산제와 베이비박스는 아동 유기를 조장한다
익명출산제나 베이비박스를 반대하는 많은 이유 중 다른 하나는 이것이 아동유기를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위기 임신 상태로 아동의 임신을 중단하기를 원하거나 양육 포기를 고민하는 친생부모에게는 "아동을 베이비박스까지 잘 데리고 오기만 하면 아동유기의 사유는 묻지 않겠다"며 손쉬운 아동유기에 대한 정보를 주고, 심지어 '안전한' 유기라며 죄책감까지 덜어주며 아동유기를 조장한다. 나아가 아동에게는 "부모의 정보를 알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부모의 정보를 알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네가 살 수 있었단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복지부 2021년 보육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5세 이하 아이를 키우는 가정은 한 달에 평균 약 100만 원의 양육비를 쓰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통계청의 2021년 평균 월급이 333만 원임을 감안하면 총 수입의 1/3이 아이 양육 비용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동 양육비의 증가는 비단 미혼모뿐만 아니라 법적 배우자의 자녀를 임신한 여성과 그 가정의 구성원들에게도 임신 및 출산 자체를 고민하게 한다. 하물며 경제적 빈곤 상태에서 임신을 했다면 이는 그 자체로 '위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여성이 아동 양육을 포기하기까지는 이 같은 경제적 위기 상황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아동 양육의 책임을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상대방 남성이 그 책임을 회피(예를 들어 여성이 임신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핸드폰 번호를 바꾸거나 게임 아이디를 삭제하는 방법으로 사라져버리는 등)하고, 불안한 고용상태에 있는 여성은 당장 휴가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혹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학업 중단이 어렵고) 당장 일을 하지 못하면 생계유지 자체가 어려워지고, 여성의 원가정과도 관계가 단절되어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등 여러 복합적인 사정들로 인하여 양육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단순히 '기록이 남는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기록에 남는 것이 두려워 '아기를 버리거나 죽일 수 있는 모성'으로 미혼모를 낙인 찍는 것으로,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구조적 편견을 고착화한다.
더군다나 베이비박스 또는 익명출산제를 통한 위기 임신에서의 상담은 이러한 산모의 유기 사유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아동 원가정 양육에 필요한 사회적·경제적 통합 지원을 우선하지 않고, 쉽게 아동 양육 포기 의사를 재단한다. 아동 양육을 포기할 만큼 어려운 개별적 사정들에 귀 기울이지 않고(또 들었다고 해결해 줄 의지도 여력도 없으니) '그래 아동을 못 키우겠다고 하니 아동을 여기에 맡기고 가라'라는 메시지만을 준다는 점에서 아동의 유기를 조장한다.
또한 익명출산제가 위기 임산부의 산전 검사와 출산 등을 경제적 지원한다고 하나, 그 대상이 되는 아동은 입양될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어려운 사정에도 아동을 양육할 의지를 가진 미혼모들은 본 제도의 지원 대상이 되지 못한다. 경제적 곤궁 등을 이유로 익명 출산 신청하고 출산한 산모가 출산 후 익명 출산을 철회하고 아동을 양육하고자 할 경우, 미혼모에게 지원했던 병원비의 환불을 요청할 것인가?
이처럼 익명출산제는 입양을 통한 아동의 양육을 포기한 경우에만 지원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경제적 곤경에 처한 산모들에게 '안전하게' 아동 양육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익명출산제가 시행된다 하더라도 기존의 베이비박스가 사라지지 않고 현존 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익명출산제는 아동 출생 전에 상담을 통하여 익명으로 병원에서 출산하도록 지원하는 것에서 나아가, 아동 출생 후에도 산모가 원하는 경우 출생 후 1개월 내에 한하여 익명으로 아동을 지자체가 인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이미 출산을 했지만, 아동 출산 후 1개월이 지난 산모에게는 익명출산제도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아동 출산 후 1개월이 지난 산모에게 또 다시 아동 양육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도록 할 것인가? 기존과 동일하게(?) 베이비박스를 이용할 가능성이 다분하지 않을까?
전폭적인 위기 임신 출산 지원 정책으로 진행되어야
이러한 상황들을 살펴볼 때, 위기 임신 출산에 대한 정책의 방향은 결국 위기 임신 출산의 모든 산모에 대한 상담 및 전폭적이고 효과적인 지원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임신, 출산 및 양육 기간 중 언제고 찾아 올 수 있는 '위기'의 시간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하며 아동과 여성 모두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고, 익명출산제를 위시한 아동과 친생부모의 영구적 분리 가능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경우, '산모 정보에 대한 익명성'을 바탕으로, 아동과의 영구적이며 손 쉬운 분리를 가능하게 하는 베이비박스는 여전히 잔존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임신-출산-양육의 전(全)과정에서 여성의 삶은 사라지고, 여성은 단지 특정 아동을 품었던 익명의 모체로서 존재할 뿐, 아동의 삶과는 영영 분리되고 만다.
그러나 여성이 아동을 임신했었다는 사실이 존재하고, 그로 인하여 특정 개인이 태어나 실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산모의 임신과 출산의 사실이 사라지지 않으며, 그로 인해 태어난 아동의 존재가 부정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모든 아동 양육의 포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첫걸음은 결국 그 여성의 삶의 이야기가 전제되어야 하며, 동시에 아동의 존재가 부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명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여지껏 이들의 어려움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베이비박스'라는 것을 안내하며 이들에게 쉽게 아동을 포기하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었다. 아동이 태어나서 존재하는데 어떻게 그토록 쉽게 없었던 일이 되는가? 이 지구상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 존재를 부정 당하는 심정을 과연 생각이나 해보았는가?
이제 우리가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효과적인 통합지원(긴급 핫라인, 의료, 거주, 자립, 양육 등)을 통한 위기 임신 지원 정책을 통하여 친부모와 아동 모두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지, 익명 출산의 도입을 통한 아동과 친부모와의 영구적 결별은 결코 아닐 것이다.
통합적 위기 임신 지원 정책의 설립 및 추진이 여러 부처(여가부, 복지부, 교육부 등)와 함께 시행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정책이지만, 결국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 다른 쉬운 길을 찾다보면 그것이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들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것이 먼저이다.
* 필자 소개: 글쓴이 전민경은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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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출산, 위기 임산부와 아동 구원한다는 잘못된 믿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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