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스파클링 와인 ‘에스텔라도 브뤼 로제’파이스(Pais)라는 생소한 칠레산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임승수
얼마 전 스페인 토레스 와인 시음회에서 만난 로제 스파클링 와인 '에스텔라도 브뤼 로제'가 불현듯 떠올랐다. 파이스(Pais)라는 생소한 칠레산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그날 제공됐던 토레스 사의 와인 10종 중에는 블라인드 테이스트에서 무려 샤토 라투르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마스 라 플라나, 수령 100년 이상의 포도나무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 만소 데 벨라스코 같은 고급 와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장 저렴한 축에 드는 이 로제 스파클링이 유독 인상 깊었다. 평소 저가 와인에 절어진 내 싸구려 입맛 탓도 있겠으나 스모키한 뉘앙스에 신선하고 상큼한 풍미가 진심으로 매력적이었다. 누군가 흙 묻은 딸기 같다고 하던데, 이 와인의 캐릭터를 촌철살인으로 표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할인하면 2만 원대에 판매하는 와인에서 이런 맛이 느껴지다니. 언빌리버블!
저렴한 와인을 적절한 음식과 매칭시켜 십만 원대 와인을 마시는 수준의 만족도를 끌어내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와인 라이프다. 하여 인도산 커리와 칠레산 흙 묻은 딸기, 이 둘의 만남을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은은한 마늘 향에 갓 구워져 구수한 빵 냄새를 풍기는 갈릭 난을 집어 든다. 먹기 좋은 크기로 찢는 행위에서부터 그 꺾이지 않는 졸깃함이 느껴진다. 팔근육을 잔뜩 긴장시켜 간신히 찢어낸 난 조각을 진득한 커리에 반신욕 하듯 푹 담근 후 입에 넣는다.
향신료 특유의 맵싸함이 구강 내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가운데 감칠맛 나는 버터 향기가 은은하게 감돈다. 난 특유의 질겅질겅 질감을 탐닉하다 보면 무언가를 씹는다는 행위가 이렇게나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 흙 묻은 딸기 등장! 시음회 때의 기억을 떠올려 VR 게임의 주인공이 된 듯 생생하게 한 모금 마셨다. 향신료의 화한 여운이 남은 자리에 놀이터 아이들 같은 탄산 기포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닌다. 참으로 발랄하고 경쾌하구나. 그 뒤로 하나도 달지 않은 은은한 딸기향이 숲속 흙내음과 뒤섞여 차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오! 확신했다. 이건 도무지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야!
곧바로 와인 수입사에 연락해 '에스텔라도 브뤼 로제'를 할인가 2만 원대로 구입할 수 있는 판매처를 수소문했다. 마침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이벤트프라자에서 행사가격 2만5천 원에 판매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서는 냉큼 방문해 두 병을 구매했다.
인도 음식과 궁합이 좋은 술은?
적당한 날을 잡아 온 가족이 다시 출동했다. 방문 전에 와인을 가져갈 수 있는지 문의했는데 콜키지 비용 1만5천 원을 지불하면 가능하다고 답변받았다. 기포를 감상하기 좋은 기다란 플루트잔이 식당에 없다고 하길래 두 개를 가방에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