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를 켜는 고등학생 노회찬 의원.
노회찬재단
-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얘기다. 삶 자체가 정치라고는 했지만, '인간 노회찬'과 '정치인 노회찬'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힌트가 하나 있다. 노 의원이 자기가 이걸 안 했으면 뭘 했을 거라고 가끔 얘기한 적이 있다. 하나는 생물학 계통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생물학을) 자기가 너무 좋아해서. 노 의원이 부산 산복도로 바로 밑에서 살았는데 위로 올라가면 노 의원이 어렸을 때 뛰어놀던 구봉산이 있다. 내가 평전을 쓰면서 가봤는데, 거기서 조그마한 동물 같은 것을 잡아와서 키우는 것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자기가 고등학교 때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안 가졌더라면 이쪽(생물학 계통)으로 갔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또 하나는 자기가 음악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신춘문예에 응모하지 않은 것을 잘한 일로 본다고 했지만 이것은 그 두 개(음악과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는 얘기다. 글도 잘 쓰고, 음악도 좋아하는데 노래를 썩 잘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악기(첼로)를 일찍 사준 배경 중 하나가 '너는 노래를 잘 못하니까 악기를 해라'였을 정도다. 음악이나 미술에 대한 감수성은 친탁(아버지쪽)을 많이 한 것 같고, 정치적인 기획이나 전략, 초지일관하는 성정은 외탁(어머니쪽)을 많이 한 것 같다.
언젠가 '타임머신 타면 어디 가서 뭐 하고 싶냐'고 하면 '난 그거 타고 싶지 않다, 그냥 이대로 갈 거다' 그랬다. 그런데 또 물어보니까 그때서야 하는 얘기가 '구한말로 돌아가서 동학농민군이 돼서 한국근대사를 다시 쓰는 역할을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소도시에서 초등학교 선생님 되고 싶다'고 하더라. 그분의 얘기로 보면 정치를 안 했으면 글쓰기, 문학, 신춘문예 등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생물학은 얘기하긴 했지만 많이 얘기한 것은 아니고. 부산고에 떨어진 다음에 자기는 고등학교에 안 가고 따로 공부해서 사시를 보겠다고도 얘기했는데 마음에 있는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기본 성정이 사회성이 높아서 설사 법관으로 간다고 해도 자신의 일신영달(一身榮達)을 위한 법조 활동은 하지 않았을 사람이다."
- 평전에서 "슬기로운 이중생활"이라는 흥미로운 표현을 썼던데 사실 그 슬기로운 이중생활이 없었더라면 '정치인 노회찬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평전에 보면,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해서 술 마시다가 동해안으로 가서 술 마신 적이 있다. 그때가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검거되기 1주일 전인가 2주일 전인가 그랬다. 노 의원이 고등학교 때부터 국회에 들어올 때까지 운동이나 정치를 하면서 같은 표현을 쓰는 것 중 하나가 '70프로의 긴장감'이라는 것이 있다. 70프로의 긴장감 속에 사는 삶, 긴장과 모험적인 삶을 즐겼다고 할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 본다. '목욕탕에 가면 냉탕이 좋으냐 온탕이 좋으냐'고. 자기는 냉탕과 온탕, 온탕과 냉탕 사이에 있는 긴장감을 좋아한다고 얘기한다. 고등학교 때 명동에 백기완 선생 등 재야인사들이 강의하는 곳이 있다. 자기는 거기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전경들 사이를 빠져 나오는 게 제일 좋았다고 했다. 재야인사들 강의를 듣기 위해서 가는 것이지만 전경들 사이를 걸어갈 때의 긴장감이 좋았다는 것이다. '고삐리'가 그렇게 할 정도로 긴장된 삶을 추구한 측면이 있다.
70프로의 긴장감에다 하나가 더 있는데 뭐냐 하면 '의지에 흔들리지 않는 직업 전투원'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노회찬식 표현이 아닌데 어디서 나왔을까 찾아보니 조해일의 소설 <왕십리>에 나오는 표현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표현이 마음에 와닿았다. 어떤 사람이 소설에서 용병으로 나오는데 용병은 직업 전투원이니까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전투하는 사람들에게 의지는 냉철한 판단을 방해하는 주관적 요소밖에 안 된다.
노 의원은 <왕십리>에 나오는 이 표현들을 고등학교 때도 썼는데, 70프로의 긴장감과 직업 전투원이라는 표현은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썼다. 일반적으로 그런 삶을 살았고, (그런 삶이) 체질화됐다. 중학교 친구들 4총사가 있는데, 그 친구들은 노 의원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운동 등에 관해 물어보면 말을 안 했다고 한다. 그냥 재밌는 얘기만 했다고 한다. 그것이 슬기로운 이중생활의 하나인데 이것이 자기의 숨통을 틔우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슬기로운 이중생활은 예술과 음식 쪽에서도 많이 있었고.
노 의원이 역사를 접근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 시대 전반의 배경보다는 그 역사 속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쓴 '노회찬의 잡설'에는 7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중학교 친구와 소크라테스, 차이콥스키, 헤겔, 김일성, 예수, 나폴레옹과 대화하는 식으로 글을 썼다. 역사는 시대별 연대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다양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쟁투의 현장이라고 본 것이다. 자기 스스로 그런 역사 속의 인물들과 대화하는 것은 역사 속에다 자기를 상정하는 것 아닌가 싶다.
노 의원이 '40대 인생론'을 떠벌리고 다녔다고 하는데 김문수(노동운동가 출신 전 경기도지사) 등이 운동을 하다가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으로 들어가던 나이가 40대쯤이다. '선배들이 왜 이러나?' 노 의원의 결론은 자기 인생 스케줄에 역사를 가지고 와서 (자기 인생 스케줄에) 맞춘다는 것이었다. 노 의원은 그것이 이해가 안 됐다. 그는 인류가 질적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유물사관을 믿었다. 이분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것 같다. 과거 민주화운동 경력을 내 정치 경력에 어떻게 활용할까, 이런 게 아니다. 이것이 정치적 실천 속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역사 속에 나를 항상 투영시켜 놓고 보고, 자기를 역사 발전의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역사 발전의 수단이다'라고 보면 결국에는 내가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노 의원 스스로 내 속에다 역사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역사 발전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발전의 주체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또 이왕이면(역사발전의 수단이면)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틈을 안 보이고 곁을 많이 안 내주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