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의 발표에 대해 박종린 한남대 교수가 토론을 하고 있다.
임재근
일제강점기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나섰고,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을 맡던 중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미군정에 의해 구속됐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총살당한 이관술의 삶과 시대를 재조명하는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수선사학회와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는 29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 소향강의실(6층)에서 '이관술과 그의 시대'라는 제목의 공동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학술대회를 공동주최한 수선사학회 김경호 회장과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오제연 소장은 학술회의 모시는 글을 통해 "이 학술대회는 사회주의를 배제하거나 저평가해 온 기존의 역사학 연구에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국 근대사와 독립운동사 연구의 문제 지평을 확장하는 현장이 되리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학술회의는 네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이관술의 삶과 시대를 종합적으로 재조명했다. 첫 번째 발제로 나선 한국사회조사연구소 박한용 연구원은 반제동맹사건을 중심으로 이관술의 삶은 살펴봤다. 이관술은 동덕여고에 재직하던 1932년 10월부터 반제동맹 결성에 참여를 했다. 그러던 중 1933년 1월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수감됐다.
박한용 연구원은 반제동맹경성준비위원회는 이관술의 민족해방운동 첫 번째 조직활동이었고, 교사라는 첫 직업은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그의 마지막 직업이 됐지만 이 조직운동을 통해 '직업적 혁명가'라는 평생의 직업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두 번째 발표에 나선 동국대학교 전명혁 연구교수는 1934년 4월부터 1935년 1일까지 조선공산당경성재건그룹 활동, 1935년 1월부터 1936년 12월까지 '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 활동, 그리고 1937년 1월부터 1938년 12월까지 '콤그룹'까지의 활동을 기록을 바탕으로 이관술 활동을 재구성해 발표했다.
이어 성균관대학교 임경석 교수는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체포된 이관술의 신문조서를 소개하며, '피의자 신문 조서'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임경석 교수는 피의자 신문조서에 등장하는 조직과 인물에 관한 진술은 다른 자료에 의해 교차 점검이 될 때에만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차 점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근거로 채택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조직과 인물에 대한 위해가 없거나 이미 증거가 드러난 사안에 관한 진술은 교차 점검 없이도 채택 가능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