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데카 광장의 게양대95M 높이의 국기 게양대는 핸드폰으로 담기에는 너무 컸다
안정인
"저기 큰 게양대의 높이가 95미터입니다. 아래 다른 깃대들에 비해 월등히 높죠? 프랑스가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에 선물한 것처럼 저 깃대는 북한이 만들어 줬다는 소문이 있어요. 말레이시아는 북한과 엄청 친하거든요."
쿠알라룸푸르에서 30년째 거주하고 있다는 한국인 가이드가 이렇게 알려 주었다.
말레이시아는 대한민국과 1960년에, 북한과는 1973년에 수교했다. 기간만으로 따지면 한국과의 관계가 더 친밀할 것 같지만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동남아시아 특유의 외교정책 때문인지 북한과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전 세계를 통틀어 50여 개뿐인 북한의 대사관 중 하나가 말레이시아에 존재했고, 말레이시아 국민은 무비자로 북한을 관광할 수도 있었다. 북한산 석탄과 철광이 말레이시아에 도착했고 말레이시아산 팜유가 북한으로 건너갔다. 북한의 노동자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외화를 벌었고 학생들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말레이시아에서 주석(광물)이 많이 났다는 건 아시죠? 그런데 지금은 채굴량이 많이 줄었어요. 그래서 주석을 수입해서 가공하는 일을 많이 합니다. 그 주석도 북한에서 들여와요."
친밀하던 양국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은 2017년 2월이다. 북한 김정은의 이복 형인 김정남이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단교 상태긴 해요. 그런데 테러에 관계됐던 여자들도 다 풀려났고, 그냥 유야무야 조용히 넘어가는 분위기입니다."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 형인 김정남이 죽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공항 CCTV 화면이 당시 전 세계인의 안방까지 전달되었다. 암살에 동원된 사람들은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Siti Aisyah)와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Doan Thi Huong)이라는 두 명의 여성으로 보도됐지만(이들은 당시 TV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는 줄로만 알았다고 주장해왔다), 이후 다수의 북한 공작원들이 암살 직후 공항을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소재로나 어울릴 법한 '암살'이라는 행위가 벌건 대낮에 벌어진 것도 자극적이었지만, 수만 명이 이용하는 공항에서 대량 살상무기로 분류되는 'VX(맹독성 신경작용제)'가 사용됐다는 사실에 전 세계는 경악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공항에 왔던 사람들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생화학, 방사능 및 핵물질 대응팀을 파견해 공항을 청소하는 한편 북한 대사를 추방해 버렸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은 자국에 들어와 있던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출국을 금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