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 '인간의 조건'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펼쳐진 폐허 위에서, 인간의 조건을 새삼스럽게 새로이 인식하는 과정을 담아 내며, '인류세'에서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박길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이 말은 영화 <부당거래>에서 양아치 같은 '주양 검사'(류승범 粉)가 내뱉는 대사다. 영화에서 주 검사는 경찰의 눈치를 살피는 검찰 수사관(공 수사관, 정만식 粉)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라고 찰지게 돌려까기 한다.
물론, 주 검사의 경우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을 악용하고 남용하고 오용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양아치 주' 검사의 오용 사례를 경계하는 것과 별개로, 인류 사회에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매우 큰 문제다.
인류세의 관점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인류 거의 전부가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인간이 누리는 자연(지구)의 호의를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자연의 호의를 인간의 권리로 알다
오늘의 시기를 '인류세'라는 지질학적인 용어로 부르기 시작한 지 20년이 지나는 시점이다(2001년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처음 제안했다). 학술적으로 용어를 공식화하기 위한 움직임도 최근에 시작되었다.
현재 공식 지질 시대 명칭인 '홀로세'가 시작된 것이 1만 년 전이므로, 현생인류는 '지질 시대'가 바뀌는 것을 '직관(直觀)'하는 최초의 인간-인류가 될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가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는 티켓일 뿐이라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아주 최근까지 인류는 '자연'이나 '지구'를 무한 에너지, 무한 원재료 공급처로 간주하며 살아왔다(아니,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편의상, 그리고 이익을 위해 모른 척하고 내처 달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성장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호도해 왔다).
최근 들어 '인간중심주의'를 자성(自省)하는 흐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것을 '천부인권'이라 부르며, 인간이 누리는 자유, 소유, 향유의 권리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라고 구가(謳歌)해 왔다.
당대의 것뿐이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베풀어질 호의까지도, 마구잡이로 가불해서 흥청망청 소비해 왔다. 경고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왔지만, 폭탄 돌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아니었다.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었다. 자연(지구)은 그동안 자신이 빌려준 것들의 목록을, 그 이자까지 차곡차곡 기록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돌려받는 방식을 아주 거친 것으로 예비해 놓고 있었다. 자비란 없다. 애초에 호의가 없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인류세'를 맞이하여, 인간은 그동안 누려온 것을 모두 토해내야 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당대에 누린 몫뿐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 땅속에 묻힌 사람들(최소 200년 전까지 소급해서)이 누리고 간 것까지, 모두 뱉어내야 한다(다른 한 가지 방법은, 그중 일부라도 상환을 미루는 것이다. 리볼링! 그리고 실제로 지금 인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지구'의 시간이다. 시시각각 다가드는 지구 차원의 불길한 예후들(기후재난과 코로나19 펜데믹 등)을 접하며 인류 대중은, 그동안 일부 선각자들이 소리 높여 외치던 바 "인간은 지구 전체의 만물과 세세히 연결된 존재다. 더불어 사는 길을 택하지 않으면, 파멸, 공멸, 전멸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점점 실감하며, 그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부제가 붙은 <인류세의 철학>은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 대지진과 그로 말미암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펼쳐진, '인간 생존의 조건'이 파괴된 폐허지 위에는 무엇이 남게 되는지를 보면서 쓴 책이다.
저자는 대지진에 의해 여지 없이 파괴된 인간 삶의 조건(문명으로 구축한 시설물, 사회구조)들을 보면서, 인간이 '사물로서의 행성'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실감하였다고 고백한다.
인간 생활은 그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과 활발하게 관련되는 것인 한, 언제나 다수의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물세계에 입각하고 있다. 인간생활은 이 세계를 떠나는 일도 없고 초월하는 일도 없다.
시노하라가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한 이 대목은 인간 삶이 사물(지구도 하나의 사물이다) 세계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지구의 호의라고 생각하며 남용한 지구의 자연 사물은 실은 인간 자신의 살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은 지금 첨예한 문제가 되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현장에서 들려주는 목소리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구로부터 날아드는 청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