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고향에서 동생이 모시러 왔으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45]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나만 들어갈 수 없다"

등록 2023.06.26 16:09수정 2023.06.26 16:09
0
원고료로 응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이항증
 
53세의 늦은 나이에 망명하여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70고개에 다달았다. 날이 갈수록 포악성이 더해가는 일제의 포위망은 드넓은 만주땅을 종횡하며 압박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후배 독립운동가들이 안전을 위해 더 깊은 산중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하고 신변을 보호해 주었다. 그의 목에 걸린 거액의 현상금은 중국인들도 넘보았다. 

마음은 아직 팔팔한 청춘인데 육신은 노쇠하여 행동을 억제하였다. 환후의 소식은 멀리 고향 종친들에게까지 전해지고, 망명 때 봉제사를 위해 고향에 남기로 했던 첫째 동생이 만리길을 찾아왔다. 환국을 권하러 온 것이다. 손부의 기록이다.

석주어른께서 병을 얻어 일곱 달째 병중이란 소식 듣고 장로님인 증조부(이상동)께서 난국(亂局)을 불고하고 서간도로 나오셨다. 이분은 3.1운동 때 안동에서 최초의 만세시위를 일으킨 분이다. 문중에서 환국할 여비와 일행들 인솔비용하라고 300원을 해주어서 그것 가지고 환국을 권하러 오신 것이다. 

형제 숙질분 상면하자 집수통곡(執手痛哭)의 그 비감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형님을 보자마자 손을 덥썩 잡고,

"형님, 이제 한국으로 들어가십시다, 이렇게 고생하실 줄 알았으면 왜 여기 나왔겠습니까?"

그랬더니, 잡은 속을 획 빼치면서

"나 죽기 전에는 여기를 못 떠난다.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나만 들어갈 수 없다. 씨나 떨어뜨리게 나 죽고 나거든 남은 가족들은 들어가게 하겠다."고 하셨다. (주석 3)


얼마 후 중국 하얼빈에 사는 둘째 동생이 찾아왔다. 서로 편지로 연통했던 것이다. 손부의 기록은 더 이어진다.

서로 서신 연락이 되어서 하얼빈에 사는 셋째할아버지도 때맞춰 오셨다. 아우되는 두 형제 분이 간곡히 권했으나 종내 '안 간다'는 말만 했다. 


그때까지 나라는 아직 독립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전 만주를 누비며 함께 일해 온 동지들을 버려두고 혼자 고국땅을 밟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당신이 이 땅에 왔다 간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다는 말씀과 나머지 가족들은 귀국해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할 수 없이 둘째 할아버지는 혼자 한국으로 도로 들어갔다. 법흥동 토지 일부를 팔아서   준비해 온 돈은 길림에 있는 집안 친척에게 맡겨 놓고 갔다. 돈을 지닌 채 들어오면 중국인에게 다 뺏기니까 서란현에 들어오기 전에 길림에 맡겨 두었는데 그 돈은 그대로 거기 두고 가셨다. (주석 4)

이상룡은 1926년 은신처에서 <도연명(陶淵明) 귀거래사에 화문하다>라는 시를 지었다. 62행에 이르는 장시다. 중간 부문 28행을 제하고 싣는다. 이 시기 그의 심기가 담긴 듯하다.

도연명 귀거래사에 화문하다

 돌아가리라
 나에게 밭과 농막이 있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만사는 모두 하늘의 뜻에 따라 정해지는 것
 어찌 실패하였다고 비통해 하겠는가
 애초 이미 생각해 보지 않고 발을 내놓았으니
 비록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
 모두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탓이니
 어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 하리요
 헛된 명예로 자신을 묶는 일 부끄러워서
 드디어 결산하고 걷어붙이고 나섰노라
 어떤 이는 경솔하다 갑작스럽다 말했지만 
 나는 실로 그 낌새를 살핀 바이라
 양함에 몸을 싣고 바다를 지나
 앞 길을 바라보며 치달렸다네
 험난한 만리 길 지나고 나서
 어느덧 내 집 대문 앞에 당도하였지
 처자는 반갑게 맞이하여 인사하고
 이웃들은 옛날 그대로 즐겁게 살고 있네
 오른 손으로 어린 손자 손잡고
 왼 손으론 향기로운 술 두루미 쥐었네

          (중략)

 한가한 나그네 찾아오면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잡지 않네
 광복의 대 사업만은
 내 어찌 감히 잊으리요
 그러나 민중이 자각하는 때가
 광복의 운이 도래하는 날 일세
 부끄러운 뜻을 씻어내자고 물을 대고
 나쁜 생각을 지우자고 김을 매노라
 관 뚜껑 덮어야 사나이 할 일 끝난다고
 옛 시에 있다고 듣지 못 하였는가
 아아!
 단군 이래 오천년 역사는
 영원하며, 단절이 없다는 것도 의심치 않노라. (주석 5)


주석
3> 허은, 앞의 책, 158쪽.
4> 앞의 책, 158~159쪽.
5> <석주유고(상)>, 259~261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상룡 #석주이상룡평전 #이상룡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협동학교 다니며 3.1혁명 참여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3. 3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4.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5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