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선 소설집 <구들 밑에 일군 밭>의 표지는 배롱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가의 고향집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었고, 이 소설집에는 여러 차례 배롱나무가 등장한다.
도서출판 말
'구들 밑에 일군 밭'은 과거 농촌공동체에서 살았던 경험이 바탕이 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금수는 군대에서 학대당해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동네에서 말한다. '그가 미쳤다'는 말은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놀림의 대상이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그런데 어린 '나'가 그를 관찰해보니 그는 미친 사람답게(?) 땅처럼 생긴 것은 남김없이 일구는 데 몰두하고(생산적인 노동에 집중한다는 점에선 모범적이다), 가끔 아이들에게 씨익 그리고 해맑게 웃을 뿐이다.
그러나 미친 사람은 정상이라는 우리의 공동체에서 나가줘야 한다. 비정상이라 낙인찍힌 사람들, 그들은 우리 울타리 밖의 타자여야 하므로. 작가는 어린 화자의 애틋한 시선으로 그의 떠나감을 지켜본다.
어린 화자의 '끝까지 지켜보았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왜 그가 쫓겨난 타자가 되었는지 의문에 눈뜬다는 것이다. 우리가 될 수 없는 그들, 불결하고 부족하고 불손하고 정상에 못 미치는 그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소환되었다.
정신병자, 난민, 성적 소수자, 장애인, 전염병 환자, 흑인, 여성, 원주민, 동양인, 유대인, 빈민, 노숙자, 다른 종교인, 노인 그리고 불법 시위자 등. 나열하다 보면 타자 아닌 것이 없다.
나도 거기 어딘가에 속한다. 우리는 모두 늙고 조금씩 장애가 있고, 부족한 존재이기에. 위험하다고 모자란다고 울타리 바깥으로 쫓겨난 타자가 힘없는 사회적 약자였다면, 언제든 나일 수 있다면.
'지켜본다'는 말은 이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의미가 된다. 관찰자였던 화자는 문제를 파고드는 작가가 되어 질문한다. 약자를 내모는 정상과 비정상은 도대체 어떻게 정한 것인가,
쫓겨난 타자 대신 우리 안에 들어온 폭력적 타자
상병은 나를 때리고 나는 개구리를 죽이고…… 어쩌면 세상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물고 물리고, 물고 물리는 거 말입니다. 그저 마지막에 물린 놈만 불쌍한 거죠. 어차피 그런 게 세상사의 이치라면 물리지 않기 위해 발악하며 사는 길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 '개구리의 죽음에서 '
'개구리의 죽음'에서 나는 임신한 아내의 뱃속 태아를 발로 차서 죽이는 해괴한 행동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항변한다. 광주항쟁에서 친구의 죽음을 옆에서 목도하고, 폭압적 군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그가 태아를 발로 차서 죽이는 괴물이 되었다.
정권에 저항하던 그는 '위험인물'로 강제 징집, 선임의 학대와 감시, 개구리 죽이기, 자본주의 인정투쟁, 그 발버둥 끝에 내면은 파괴되었다. 괴물에 맞서 싸우다 괴물이 되어 버린 폭력의 대물림, 발버둥의 악순환 구조에 갇혔음을, 작가는 내밀한 개인사를 따라가며 보여준다. 정권을 갈취한 폭력적 타자가 우리를 집어삼키고, 우리 행세를 하고, 우리의 기준이 되었다. 폭력이 일상이 된 사회, 그것이 정상의 숨겨진 얼굴이었다.
'산이 흐르다'에선 비정상이 정상으로 고착되는 구겨진 한국의 역사를 추적한다. 나는 우연히 어머니를 따라간 고향의 초상집에서 목격한 사건에 충격을 받는다. 친밀했던 농촌공동체가 전쟁 직후 좌익, 우익이라는 죽기 살기식 편 가르기 싸움 끝에 마을사람들의 희생을 가져온 참상이었다.
싸움에서 이긴 자는 40년이 지난 90년의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역사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음을 목격한다. 주인공 가족이 누린 단물은 아버지가 마을의 비극에서 챙긴 승자 독식의 전리품이었다.
진 쪽은 삶이 내동댕이쳐 있었다. 소설은 누군가의 희생에 눈감으며 만들어진 우울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돌아보게 한다. 슬프게도 소설이 쓰인 30년 세월 후인 2023년, 오늘도 이 비정상은 진행형이다.
'개구리의 죽음'과 '산이 흐르다'가 거대한 한국사의 흐름에서 폭력적 타자에 질식한 우리 이야기라면, 단편 '타인들'은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들여다보면서 친밀한 우리가 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야기이다.
'타인들'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독백이란 방식으로 각자 가족의 역사를 회고한다. 각자는 자신의 욕망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다른 자식을 더 챙겼다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나를 지켜줄 힘이 없다고,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받았다고 말한다.
서술은 달라도 모두 자기 연민의 넋두리와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한탄이다. 고로 가족이 이렇게 된 것은 '나는 잘못 없다, 다른 구성원의 잘못이다'로 귀결된다.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을 끌어모으는 구심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가족이 할아버지를 중심에 두고 방사선으로 흩어졌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 '타인들'에서
그런데 각자의 독백을 견주고 통합해보면 서로의 기억이 다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모아서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상처 주는 말을 내뱉고도 기억하지 못한다. 왜 그랬냐고 묻고 싶은 말을 묻지 않는다, 위로받고 싶다는 말을 차마 못 한다. 그렇게 쌓인 오해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기억이 되고 해석이 되고 판단이 되었다. 그 결과 서로가 깊은 거리감을 가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 가족은 영락없는 우리 모습과 겹쳐 씁쓸하다. 서로가 내로남불인데 정작 거기에 나는 빠져 있다. 우리가 되는 데에 '너와 같이'가 아니라 '나와 같기'가 강요되어서이다. 그리하여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우리의 굴레에서 벗어나 안주하고 숨을 수 있는 나만의 벙커를 또 찾아 나설 것이다.
큰 공동체에서의 우리 되기도 마찬가지다. 동질성을 방해하는 것은 몰아내야 하는 타자이다. 우리가 되지 않으면 폭력도 개입한다. 우리 되기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나와 같아지기만을 강요하는 것.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독점하려는 것에.
'어떻게 우리가 같이 삶을 꾸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폭력적 타자가 우리가 되지 않게 하려면 저항밖에 없다. 그런데 친밀함을 회복한 우리만이 연대와 저항의 힘을 가질 수 있다.
'타인들'은 친밀한 우리 되기의 어려움을 말하지만, 우리 되기의 가능성도 보여준다. 가족들이 유일하게 서로에게 다가설 때는 아버지가(할아버지가) 땅을 일구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 땅에서 파아란 모가 가득한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볼 때였다. 여기서 '지켜본다'는 것은 적당한 거리에서 상대를 응원하고 보살피는 일이다.
내 울타리 담을 조금 무너뜨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