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차 직권재심 재판 공안안내 (1), 30명의 수형인 피해자의 이름과 죄명을 나타내고 있다.
제주다크투어
제32차 직권재심 재판 피고인 중 망 이동신, 김병길, 김창종, 이팽로, 박홍기, 강재옥, 강병수, 이태순, 양군선 이하 9명은 1948년 12월께, 일률적으로 구 형법 제77조 위반 내란죄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날 재심재판에서 밝혀졌듯 검찰은 이들이 내란죄라는 공소사실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망 강재옥은 28세의 운전수였다. 그는 무장대로 오인 받아 토벌대에 연행된 후 내란죄 위반으로 15년형을 받아 목포형무소에 있다가 대구형무소로 이감됐다. 그러다가 행방불명됐다. 이날 그의 아들 강OO은 재판정에 참석해 "어머니는 제가 5세 때 재혼해갔고, 하나도 모르겠다. 할 말이 없다"라며 75년의 세월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느끼게 했다.
망 강병수는 애월리 출신으로 제주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17세의 청소년이었다. 1948년 7월 토벌대가 급습해 연행돼다가 내란죄 위반으로 15년형을 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 수형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동생 강OO은 판사에게 "기억나는 게 없다. 제가 형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만 기억난다"면서 형에 대한 기억을 전했다.
망 이태순은 부모님 밑에서 농사를 짓다가 어느 날 경찰에 연행됐다. 이후 가족들은 소식을 몰랐다고 한다. 그는 내란죄 위반으로 5년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형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외조카 고OO은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아들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는 소감을 남겼다.
제32차 직권재심 재판 피고인 중 망 양태운, 송창립, 고순학, 김상국, 양상순, 홍순병, 고두정, 정영익, 고성봉, 고형관, 김시옥, 양군봉, 김홍영, 한치욱, 김영희, 김이오, 이대봉, 문성영, 이윤옥, 신두옥, 한인수 이하 21명은 1949년 7월경 '국방경비법' 제32, 33조 위반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 및 간첩죄'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들 역시 공소사실을 증명할만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 이날 검찰의 의견이었다.
망 송창립은 오라리 출신의 19세 청년으로 1949년 밭으로 나갔다가 연행돼 7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 수형됐다가 행방불명됐다. 재판에 참석한 조카 송OO은 "사진 속에서만 작은 아버지를 봤다. 할머니가 2000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피고인이 어딘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한인 것 같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현대사회에 일어났다는 것이 아쉽다. 제주도, 한라산을 다 태워서라도 공산 폭도를 잡겠다고 해서 희생된 것이 제주도민이 아닌가 생각한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망 고순학은 대정면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 형을 구형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형돼 있다가 부산형무소를 거쳐 마산형무소로 이감, 이후 행방불명됐다. 그의 조카 고OO은 "오늘 재판에서 피고인이 마산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생전에 아버지에게 대전이라고 들었었다"라며 "오늘 망인이 무죄선고를 받는다면, 마음 한쪽의 무거운 것을 내려 놓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망 김상국은 오라리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7년형을 선고 받아 대전형무소에 수형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조카 김OO은 " 큰아버지가 너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오늘 이렇게 재심을 통해서 무죄판결 받아서 지금이라도 편안하게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다"는 짧은 소감을 남겼다.
망 홍순병은 오라리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동생 홍OO은 재판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얼떨떨하다. 사실상 형님은 아버지와 같이 농사를 짓다가 공권력에 의해서 죽어가서, 아마 대전형무소에 계셨던 것 같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버지는 형이 무슨 연유에 의해서 끌려가서 감옥살이를 했는지 상당히 억울하게 생각하셨다. 한 10년 전 까지도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았을 것이다 생각하면서 제사도 안지내고, 생일날 제상을 마련해왔다.
저는 동생이지만, 연좌제라는 혹독하는 법이 있어서 사회에 진출하려니 어려웠다. 뭔가 노력해서 해보려고 했는데, 연좌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억울했다. 만약 무죄판결이 내려진다면, 영령이 가시는 데 상당한 위로가 될 것이다. 동생으로서 어느 정도 형님의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내려주신다면 저 또한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망 정영익은 가시리 출신으로 28세에 농사를 짓다가 마을 초토화를 피해 산으로 도피했다가 연행됐다. 이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후 행방불명됐다. 그의 손자 정OO은 판사에게 "할아버지가 사망 당시 아버지가 4살, 큰아버지가 7살이었다. 그 나이에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겠는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이 과정에서 저희 할머니, 증조부까지 4명이 모두 희생되셨다"라며 "과거의 잘못된 정부의 판단으로 무고한 도민이 희생을 당한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증거도 없이 끌려가 생사도 모르는 그런 시간 동안, 우리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가묘를 만들어 제사지내던 것이 너무나 억울한 부분이다. 재판장님의 이번 재심에 있어서 현명한 판단을 바라겠다"라고 밝혔다.
망 고형관은 광령리 출신으로 구장직을 맡다가 소개령에 의해 하귀리 살던 중 1949년 1월에 연행됐다고 한다. 그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7년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이 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아들 고OO은 재판에 참석해 "말이 잘 안나오는데, 30대 나이에 마을 구장이라는 그 직책이 힘들었겠는가. 그 직책을 맡았다고... 아버지는 죄가 없다고 들었는데, 나는 학교도 못 다녔다"라며 "우리 둘째 자녀는 그래도 대학을 안가고 공군사관학교를 간다고 했는데 합격을 하고도, 신원조회로 잘려버렸다. 그 상처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오늘 재판으로 그 상처가 조금 낫는 것 같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남겼다.
망 김시옥은 와흘리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됐다. 그의 조카 김OO은 마이크를 들며 "아버지가 4형제다. 얼굴도 모르고, 사진도 없다. 망인의 죄명이 뭔지도 여기와서 알았다.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았다. 군인도 아닌데 국방경비법의 적용을 받은 것도..."라며 "연좌제가 뭔지도 처음에는 몰랐다. 전부 다 억울한 삶을 사셨는데, 지금이라도 이렇게 명예회복을 할 기회가 와서 반갑다"라고 밝혔다.
망 한치욱은 와산리 출신의 20대 청년으로 토벌대를 피해다니다가 함덕리 주둔지에 자수했다. 그는 이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 형을 받았다. 이후 가족들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다는 편지를 받았으나 이후 행방불명됐다. 그의 딸인 한OO는 "우리는 어려서 잘 모르는데, 아무 죄도 없이 끌려가서 돌아가셨다는데, 아버지 시신이나 찾아졌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