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강화도령’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이경수 작가는 30여 년 만에 진짜 ‘강화도령’ 철종에 관한 책을 썼다.
최진섭
용흥궁은 강화도령 이원범이 귀양 생활하던 초가집을 철종(1831~1864)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1853년)에 기와집으로 개축한 건물이다. 철종은 강화에서 유배 생활하던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의 조부 이인에 이어 부친 이광까지 무려 37년간이나 강화에서 귀양살이했기에 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비가 와서 그런지 용흥궁에는 관람객이 보이지 않았고, 먼저 도착한 이 작가가 툇마루에 홀로 앉아 있었다. 저서에 소개된 필자 약력을 통해 고향이 강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몇 가지 더 물어보았다.
- 강화가 고향이라고 들었는데, 태어난 동네가 어디인가요?
"네, 고려궁지 바로 밑의 궁골(강화읍 관청리)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어요. 강화초, 강화중, 강화고를 졸업했고요. 적어도 증조부 때부터 집안 대대로 강화에 살았죠."
- 어쩌면 궁골에 사시던 증조부나 고조부께서 용흥궁 주변을 지나치거나 강화도령을 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겠죠."
- 고려궁지가 작가님의 어릴 적 놀이터였나요?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고려궁지 안의 명위헌(동헌) 건물을 강화군립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죠. 가끔 도서관 가서 책을 보기도 했지만 집 앞에 있던 만화방에 더 자주 갔고요."
- 이곳 용흥궁에도 자주 왔습니까?
"그 시절엔 용흥궁이 유적지가 아니고 민간인 살림집으로 사용됐어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집주인 이해승 후작이 세를 주면서 집 꼴이 엉망이 됐는데, 그때부터 궁의 위엄은 사라졌어요."
생가 바로 위아래에 고려궁지와 용흥궁을 끼고 살던 이 작가는 사범대로 진학해서 역사 교사가 되었고, 1989년 경남 마산중앙고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다. 학생들은 강화가 고향인 역사 교사에게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1993년 김포 양곡고로 옮겼으며 2017년 명예 퇴직할 때까지 이곳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로 일할 때 강화 역사 개설서인 <강화도史>를 냈고, 명예퇴직 후에는 더 활발한 저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연산 광해 강화>, <오군, 오군, 사아이거호 – 강화도에서 보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 등은 명퇴 후에 낸 책이다. 이 중에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푸른역사, 2014)는 5쇄를 찍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 작가는 저술 외에도 김포문화원이나 강화문화원, 강화노인복지회관 등에서 역사 강의를 꾸준히 하고 있다.
용흥궁에서는 작가의 인물 사진만 찍고 주변의 조용한 카페로 이동해서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한적한 용흥궁에서 철종을 주제로 인터뷰 하는 것이 더 좋겠다 싶어서 툇마루에 눌러앉았다.
드라마, 영화의 강화도령 이미지는 완전 픽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