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씨의 아픈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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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가명, 37)씨는 그곳을 '추운 집'으로 기억했다.
그녀는 발바닥에 닿던 차가운 감촉, 읽던 책을 모아놨던 작은 방, 그 방안에서 나던 입김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방에는 다홍색 큰 꽃이 그려진 이불이 깔려 있었고,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불 안에서 TV를 봤던 일곱 살의 자신을 기억했다. 그리고, 이불 아래로 자신을 만졌던 축축하고 뜨거운 손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행동도 못 하고 그저 얼어붙은 뻣뻣한 나뭇가지처럼 앉아있었던 게 기억이 나요. 처음 겪는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웠던 일이라... 그때가 첫 피해였어요."
1992년 서울 신정동의 추운 집에서 시작된 성폭력은 사당동 아파트, 그 사람이 살던 단칸방까지 이어졌다. 강제추행과 준강간의 성폭력은 가해자의 딸이 태어난 즈음에야 멈췄다. 지안씨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된 1994년 9월경의 일이다.
가해자는, 엄마가 가장 사랑하던 여동생의 남편이었다.
피해 사실 알리자 돌아온 엄마의 반응 "이 얘기는 비밀로 하자"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에게 피해사실을 처음으로 얘기했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해보라'는 질문에 튀어나온 말들이었다. 선생님은 바로 엄마에게 전화했다. 집에 돌아온 지안씨는 엄마에게 "모두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엄마는 "어디를 만졌는지, 몇 번이나 그랬는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모 두 번째 결혼인데 잘못되면 큰일 난다, 이 얘기는 엄마와 비밀로 하자. 아빠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그때만 해도, 이 모든 사실이 '비밀'이 돼버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작 열 한 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분했다. 엄마가 전혀 문제 삼지 않는 일에 대해 '전혀 괜찮아지지 않은' 자신이 이상한 사람 같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친한 친구에게 털어놨지만 오히려 "비밀이 알려져 이모의 두 번째 결혼이 불행하게 될지 모른다"는 죄책감마저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엄마는 그 후에도 이모 부부와 만나는 자리에 지안씨를 데리고 다녔다. 항의하자, 지안씨를 놔두고 이모 부부를 만났다. 마음속에 불길이 일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자 심장에 통증을 느꼈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죽을 것만 같아 병원에서 검사를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심장전문의는 신경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이때, 아빠도 지안씨의 피해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누구도 지안씨 옆에 서주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안씨네 가족은 이민을 떠났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악몽을 꿨고, 이유 없이 몸이 아팠으며, 살아있는 것 자체에 비참함을 느꼈다고 했다. 1년 후, 그녀는 부모에게서 독립했다. 그리고 삶을 끝내려 했다. 자살을 시도했던 딸을 향해 엄마는 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지안씨는 "아직도 성폭력 당하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며칠 후 가해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미안하다고 했다.
"2006년 9월 11일 일이에요. 가해자가 '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 몰랐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뭐가 미안하냐니까 거듭 '미안하다'고만 했어요. 전화기를 붙들고 짐승처럼 울었어요."
침묵을 강요받은 삶 "차라리 정신이 나가버렸으면 좋겠어"
아침저녁으로 정신과 약을 먹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삶을 끝내려 했다. 병원에 실려 간 지안씨를 향해 "죽을 생각도 없었지?"라고 말하던 엄마. 입버릇처럼 이모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말하던 엄마. 지안씨는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를 들으면 침을 흘리듯, 피해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차라리 정신이 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날이었다.
와중에 그녀는 부모님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제발 사랑해달라는 호소였다.
"미국에서 사는 내내 물심양면 최선을 다해서 효도했어요.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어요. 온몸을 갈아 넣어 부모님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어요. 그래도 끝내 누구도 저를 돌아봐 주지 않았어요. 부모님 앞에서는 늘 웃었어요. 제 감정이, 불행이, 괴로움이, 고통이 부모님에게는 너무 가볍게 여겨지는 거 같아 더 이상 진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