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간된 소설가 김남일의 노작 <한국 근대문학 기행>
학고재
문학을 집에 비유하자면 그걸 구축하는 3가지의 주요한 기둥이 있다. 가장 먼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라는 것. 이를 통상 '주제' 혹은 '주제의식'이라 부른다.
두 번째는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인물'. 산문 형식을 취하는 소설은 물론이고, 운문이라 해도 이야기시(詩)의 형식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기둥이다. 마지막은 우리가 중·고교 시절 교과서와 참고서에서도 배운 바 있는 '배경'. 이 3가지 기둥으로 완성되는 것이 바로 소설과 시.
최근 중진작가 김남일(66)이 '문학의 3요소'라고도 부를 수 있는 주제, 인물, 배경 중 '배경'에 포커스를 맞춰 한국 문학사를 정리한 흥미로운 책을 내놓았다. 모두 4권으로 엮인 <한국 근대문학 기행>(학고재)이 바로 그것.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는 이미 100년을 훌쩍 넘어섰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시기, 여기에 집약적 경제개발 시대와 긴 시간 이어진 군사독재시대. 그 시간을 넘어 억눌린 민중들의 민주화 요구가 빗발쳤던 1980년대를 거쳐 오늘까지.
장편소설 <청년일기>와 <국경>,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산을 내려가는 법> 등을 출간하며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해온 김남일은 40년 이상 꾸준히 소설과 산문을 써온 작가다.
제3세계에 대한 관심도 지극해서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창립을 주도했고, '아시아 문화 네트워크'와 '한국과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에서의 활동도 주목받았다.
문장으로 그려낸 '한국 근대문학'의 풍경화
몇 년에 걸쳐 서울과 도쿄, 함경도와 평안도 곳곳에 숨겨진 이 나라 근대문학의 배경을 찾아다니며, 선배 작가들의 시와 소설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살핀 김남일은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출간의 의도가 담긴 것이라 그대로 인용한다.
"나는 대체 우리 문학의 근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말 그대로 풍경화였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이어 죄인처럼 수그리고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이용악의 두만강이나 어느 날 소설가 구보 씨가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식민지 서울의 도처처럼 우리 문학의 무대로서 뚜렷한 아우라를 지닌 '장소들'...(중략) 진달래꽃이 피고 지던 소월의 그 영변이 이제는 끔찍하게도 핵으로만 기억된다. 이럴진대 100년 전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또 제 고향 평안도에 가서는 다시 이름도 생소한 팔원 땅에서 추운 겨울날 손등이 죄 터진 주재소장 집 가련한 애보개 소녀를 만났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하략)"
각각 <서울 이야기>, <도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라는 제목을 단 책에서는 그간 한국 문학의 독자들이 잊고 살았거나, 소홀히 살피며 넘어갔던 소설과 시의 공간적 배경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서울 이야기>에선 장마철 북촌 풍경과 종로를 서성이던 어린 소녀, 시인 이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함경도 이야기>에선 함경선 기차에 오른 평안북도 정주 출신 소설가 이석훈과 두만강을 서성이는 작가 최인훈의 그림자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평안도를 이야기할 때 시인 백석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백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우난골'이 대체 어떤 곳이었는지, 20세기 초중반 평양은 작가들의 문학적 영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는 건 <평안도 이야기>다.
'관동 대지진'과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단어를 발음할 때면 연이어 눈앞에 떠오르는 일제강점기 도쿄. 그 제국 수도의 뒷골목에서 울분과 환멸의 술잔을 들던 젊은 조선 작가들의 영상은 <도쿄 이야기>에서 확인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