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곡천 남측하천 변에 높은 가림 벽으로 막아선 모습. 성업 중인 업소 모습을 가리고 있다. 사진 왼쪽 멀리 연풍교가 보인다.
이영천
집창촌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 건 1백여 년 전이다. 17세기 초 일본에서 시작된 유곽이, 메이지유신 이후 국가 허가라는 공창제에 법적 근거를 두고, 성매매업을 영위하던 시설로 탈바꿈한다. 개항장에 제한적으로 도입된 유곽이,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집단화하기 시작한다. 이를 일본인들이 장악하면서, 피식민지 시기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이때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축재(蓄財)하는, 참으로 천박한 문화다.
한국전쟁 이후 대도시 집창촌이 대규모화한다. 미군이 주둔한 소도시엔 '기지촌'이 형성되어, 대도시 그것과 구별되어간다. 미군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부대를 접수하여 한반도 요소마다 주둔한다. 특히 휴전선 서북부에 집중되어 있던 미군 부대 주변에 기지촌이 빠짐없이 자리했다.
연풍리에도 미군 부대 영향으로 기지촌이 생겨, 1960∼70년대 국가가 정책으로 지원한 혜택까지 톡톡히 누리며 성장해왔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치르며 무고한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분단된 남한은 미군 눈치를 보며 나라가 나서 버젓이 범죄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미군 부대가 있는 곳 어디서나 벌어진 현상이었고, 그 후과(後果)는 오롯이 현세대의 숙제로 남았다.
먹이사슬
수십 년 범죄를 방치하다시피 하던 공권력이, 2000년 들어 변화하기 시작한다. 서울 종암경찰서장으로 부임한 한 여성으로 인해서다. 각종 인허가 등에 불법적 행태가 들춰지고, 경찰력을 동원해 수요 차단에 나선다. 싸움의 서막이었다. 그러함에도 단기적 충격파에 그치고 만다. 법적 근거가 미약했기 때문이다.
미군 부대가 2004년부터 순차적으로 평택으로 이전하기 시작한다. 부대 이전으로,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던 기지촌이 쇠퇴기를 맞는다. 경기도에서는 의정부와 동두천, 파주가 유사한 상황이었다.
싸움의 본격화는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고서다. 이 법으로 서울은 물론 집창촌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던 각 도시에서 고된 싸움이 시작된다.
여기서 집창촌이 작동하는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먹이사슬 가장 상부에 토지와 건축물 소유주가 있다. 업소를 운영하지 않는 한, 이들은 임대인으로서 안정적인 수익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