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보고서들
이정희
육십 무렵에 선택한 일은 앞서 젊은 시절, 혹은 중년의 시절에 선택하는 일과 입장이 좀 달라지는 듯하다. 누군가 나에게 다시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냐면 나는 기꺼이 거절한다고 할 것이다. 나에게 이십대는 너무 벅찼다. 시대는 막막했고, 그 시대를 뚫고 거기에 내 자신의 미래까지 감당해야 하는 그 시절에 나는 어찌 살아야 할 지 몸둘 바를 몰랐다. 그런가 하면 중년의 나는 무거웠다. 내가 낳아놓은 아이들, 내 가정이라는 의무가 나에게 얹혀져 늘 나를 짓눌렀다.
그렇다. 젊은 시절도 그렇고, 중년의 시절도 그렇고, 그때의 나는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고,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렸다. 발은 현재를 딛고 있었지만, 미래를 향해 이 삶을 끌고 나가야 한다는 욕심이 앞섰다. 이제 육십 즈음의 나는 그렇게 젊은 시절 나를 휘감쌌던 '욕망'으로부터 한결 홀가분해진 처지가 되었다.
결국 궁극에 이르는 건 죽음이요, 그 시기까지 나를 잘 보살피다 가면 되는 시기가 되었다. 더 잘 살아야 할 것도 없고, 더 이루어야 하는 것도 없어, 그저 내가 마음가는 것들을 조금 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무얼 이루어야 한다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한 발자국씩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계층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어야 할 누군가가 필요하고 내가 할 수 있다면 해보자는 마음의 여력이 생긴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초등 중학년이 되도 문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고, 공부라는 걸 해보지 않아 한 주만 지나면 리셋되어 해맑게 웃는 아이들에게 예전 내가 그랬듯이 불도저처럼 밀어부치다가, 스스로 반성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배움지도사가 그저 공부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하는 일인데 혹시나 그런 면에서 무심하지 않은가 반성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제 할머니뻘 나이가 되니 아이들이 밉지 않다. 예전에 비해서는 덜 강퍅한 어른이 된 것도 같다.
어제와 오늘, 아침부터 담당 공무원이 연락을 했다. 선생님 보고서를 보다보니 아이 상황이 쉽지 않은 듯하다고 고생하신다고. 질풍노도의 시기니 그렇죠 하면서, 그래도 담당하시는 분이 상황을 알고 계셔야 할 듯해서 보고서는 가급적 자세히 쓰려하다 보니 구구절절 쓰게 된 것 같다고.
그렇다. 나랏돈(?)을 받으며 일을 하다보니 매일 써야 하는 게 그날의 보고서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뚝딱 저녁을 해치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적어간다. 조금 전 가르쳤던 내용인데도 가물가물, 궁여지책으로 가르쳤던 목차를 찍어오기도 한다. 어떤 날은 잘 따라온다고 했다가, 어떤 날은 다 까먹어서 발음부터 써주면서 했다고 하고.
일어나서 수업가고, 아이들이랑 씨름하다 보면 하루가 저문다. 돌아와서는 보고서를 붙잡고 끙끙. 형제들이랑 놀러가는 거 아쉬워할 새가 없다. 그렇게 일주일이 후딱, 덕분에 삶이 참 담백해져 간다. 매일 아침 기도한다. 오늘 하루도 성실하게 살아낼 수 있도록. 나도 나무처럼 그저 오늘의 내 할 바를 하며 이 시절을 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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