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학교역 자리에 세워져 있는 5·18사적지 표지석. 옛 학교역광장은 1980년 5월 마을주민들이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한데 어우러져 민주화를 외쳤던 공간이다.
이돈삼
5·18사적지와 학다리초등학교
급수탑 인근에 5·18사적지 표지석도 세워졌다. 예전의 학교역 앞 광장 자리다. 1980년 5월 21일 광주에서 차를 타고 시위대가 내려왔다. 시위대는 역전 광장을 몇 바퀴 돌면서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그날은 석가탄신이었다.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 오후 1시 금남로에서 도청으로 진출하려는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이 총을 난사했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애국가가 신호였다. 우리 군대가, 우리 국민에게 총을 쏜 것이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이 무장을 한 계기다. 시민들은 나와 내 가족, 이웃을 지키기 위해 손에 무기를 들어야 했다. 광주 인근 나주, 화순, 함평, 영암 등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시민군이 결성됐다.
광주의 시위대와 만난 지역청년들이 호응하며 학교역 시위대의 규모가 커졌다. 시위대는 가까운 학다리초등학교 운동장을 돌며 계엄철폐, 민주쟁취를 외쳤다. 계엄군의 만행과 광주의 참상을 전해들은 지역민들은 분노했다.
당시 광주와 전남은 '남'이 아니었다. 형제와 자매, 친구와 이웃이 광주에 많이 살고 있었다. 하나의 생활 공동체였다. 광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학다리 주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더 달랐다. 학교사거리의 주유소에서는 시위 차량에 기름을 그냥 넣어줬다. 학다리 주민들이 보여준 또 다른 형태의 '주먹밥'이었다.
시위대는 '광주로 가자!'며 역광장을 떠났다. 일부 시위대는 무안․목포 방면으로 내려가 시위를 계속하며 경찰서 무기고를 찾았다. 5월 그날, 뜨거웠던 시위대의 절규가 표지석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