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지볶음과 리슬링이 조합을 경험하면 소주 생각은 싹 달아난다.
임승수
이쯤 되면 대개 차갑고 쓴 소주를 떠올리겠지. 하지만 와인 애호가인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드라이(달지 않은) 리슬링이 생각난다.
청포도 품종인 리슬링은 독일, 프랑스 알자스 지역에서 주로 재배된다.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고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쨍한 신맛과 달큼한 잔당감의 조화가 일품이다. 당도를 높여 스위트 와인으로 양조하기도 하는데, 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단맛은 애호가들의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음식과 와인의 궁합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낙지볶음과 드라이 리슬링은 내가 경험한 다양한 조합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낙지볶음에서 와인을 떠올리는 이는 드물겠지만, 누군가 이 조합을 경험하기만 한다면 소주 생각은 싹 달아나리라 확신한다.
리슬링은 화이트와인이라 시원하게 마시는 술이다. 제대로 매운 낙지볶음이 왕림하신 구강 내부는 미각 세포들의 비명 속에 통증이 생성되는데, 리슬링의 시원함이 일차적으로 이 통증을 완화한다. 이어서 신선한 산미와 함께 상큼한 복숭아, 사과, 감귤 향이 구강과 비강 안에서 퍼져나간다.
뒷맛에서는 은은한 잔당감이 낙지볶음 매운맛의 여운과 오버랩되며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두 맛의 어울림이 재미로도 미학적으로도 참으로 인상적이다. 리슬링에 특유의 이 잔당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매운 음식을 먹고선 뜬금없이 시큼한 레몬을 한입 베어 무는 행위처럼 생뚱맞고 당혹스러운 조합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도 드라이 리슬링을 무척 좋아하신다. 어머니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시는데 한 달에 한 번 건너오셔서 우리 부부와 함께 와인을 드신다. 얼마 전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준비한 와인이 있었다.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 브론즈락 리슬링 트로켄이다. 무슨 암호문 같다고?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는 와인 회사명, 브론즈락은 제품명, 리슬링은 포도 품종, 트로켄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달지 않은 와인이라는 의미다. 와인 해외직구 사이트로 유명한 위클리와인에서 약 3만 8000원의 가격으로 구입했다.
낙지볶음은 배달앱으로 주문했다. 배달이 가능한 인근 음식점 중에서도 맛이 괜찮아 종종 주문하는 곳이다. 일부러 신경 써서 리슬링과 낙지볶음의 조합을 준비했는데, 어머니가 드시더니 너무 맛있다며 활짝 웃으신다. 역시 한국인의 입맛에 최적화된 꿀조합이다. 그런데 어머님이 너무 벌컥벌컥 드시는 바람에 한 병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낙지볶음에 맞는 리슬링은 따로 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어머니 이렇게 셋이서 와인 한 병이면 아쉬울 만도 하지. 어머니의 강력한 요청으로 셀러에 보관 중이던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 겔블락 리슬링 트로켄을 추가로 열었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와인이지만 브론즈락보다는 한 등급 아래의 와인이다. 약 3만 원의 가격에 구입했다. 브론즈락보다 대략 8000원 정도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