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노동시간 개악 저지 윤석열 정부 규탄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종래에도 모든 노동자가 표준근로주(standard workweek)에 따라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 제1호 협약 채택 당시에도 제조업에서는 이미 몇 가지 기본적인 교대제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다양한 교대제가 있음은 물론 다른 형태의 유연한 노동시간 제도(flexible working time arrangement)가 활용되고 있다. 한편 노동자의 시간주권 제고와 기업의 경영 효율성 제고를 위한 노동시간 유연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외견상 유사한 제도가 그 도입 목적에 따라 일의 세계에 정반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먼저, 사용자 중심의 유연화에는 교대제(shift work) 등 사업 운영상의 요구에 따라 결정 및 변경되는 일정, 노동시간의 평균화(한국법상 탄력적 근로시간제), 호출 노동(on-call work)이 포함된다.
반면, 노동자 중심의 유연화는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의 노동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선택권이나 영향력을 갖는 노동시간 편성을 말하며, 몇몇 중요한 모델로는 선택적 근로시간제(flexi-time arrangements), 근로시간저축계좌(time-banking), 집중근무주(compressed workweeks) 등이 있다. 물론 사용자와 노동자 요구 모두를 충족하도록 고안된 다양한 유형의 노동시간 편성도 가능하다.
이중 노동자의 시간주권과 관련이 있는 것이 '노동자 중심의 노동시간 편성'임은 물론이다.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근무 일정이나 노동시간에 대해 선택권을 갖거나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노동시간 편성은 노동자의 복지와 '일과 삶의 균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기업의 경영 효율성 제고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할 것이다.
노동자 측의 자기결정권 제고 방안
코로나 팬더믹으로 가속되기는 했지만, ICT 기술의 발전이라는 물적 토대에 기반을 둔 노동시간의 개별화·유연화 경향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법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현행 근로기준법상 유연 근로시간 제도를 전반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2018년 근로기준법 개정 이후 정부 정책은 탄력적 근로시간 제도 보완 정책에 집중됐지만, 우리나라의 탄력적 근로시간 제도는 주로 교대 근무를 하는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제도다.
따라서 노동자의 시간주권 강화와 관련해선 오히려 재량 근로시간 제도의 적용 대상 확대가 필요하다. 재량 근로시간 제도를 활용하는 기업은 노동자가 자신의 과업을 약정된 기간 내에 자기 책임으로 이행할 것을 신뢰하고, 따라서 상급자에 의한 출퇴근 통제와 같은 형식적인 노동시간 파악은 이뤄지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약정된 노동의 결과가 기한에 맞춰 나와야 한다는 것이고, 언제, 얼마나 오랫동안, 어디서 일하는가는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재량 근로시간제는 업무가 과업 지향적으로 부여되고 낭비되는 시간이 적어지며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일 생활 균형' 차원에서도 긍정적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노동자는 높은 수준의 성과에 대한 요구를 받게 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권한도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도한 업무 부담을 수반하는 비현실적인 과업이 부과됨으로써 노동자의 건강을 해칠 위험이 있다. 이처럼 재량 근로시간제는 노동자에게 과로와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등 관계 법령에 의한 노동자 건강 보호 조치 강화가 필요하다.
이외에도 일정 수준의 소득보장을 전제로 하는 휴가 제도 개선이 필요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정한 근속기간 및 출근율의 충족을 전제로 하는 기존의 연차휴가 제도 이외에 모든 일하는 사람의 기본권으로서의 '휴식권' 보장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또한 재택근무의 경우 일과 가정생활 경계의 모호함으로 인해 장시간 노동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연결차단권' 도입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것이다.
생애주기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간주권
산업구조의 변화와 기술 발전은 노동자가 수행할 작업 자체를 변화시키고, 이는 한편으로는 기존 숙련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숙련요소에 대한 수요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력이 부족한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과 급속한 기술변화의 시대에서 사용자가 요구하는 일 사이의 '기술 불일치'로 인해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의 활용도 감소와 이로 인한 경제성장의 속도 저하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삶은 연속적인데 고용의 불안정으로 인해 일자리는 툭툭 끊기는 불안정성이 심화 된다.
따라서 이제는 정태적인 일자리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동태적인 경력에 대한 권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직무교육에 대한 공평한 접근이 보장돼야 한다. 나아가 사람들이 생애 전체에 걸쳐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하나의 노동 형태에서 다른 노동 형태로 전환할 수 있으며, 사생활과 직업 생활을 조화시킬 수 있도록 보장할 필요가 있다.
급속한 기술 발달 및 이로 인해 기업이 노동자에게 요구하는 기능 변화는 기업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기업 내에서 노동자를 교육해야 할 유인을 줄이고 있다. 이처럼 종래 내부노동시장이 제공하던 직업 능력 개발 기회가 감소하고 있음에도 외부노동시장이 이를 보충하지 못할 경우, 사회경제적 비경제의 발생은 불가피할 것이다. 외부노동시장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개개인의 경력이 원활하게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차원에서 경력 형성 및 발전의 기회를 준비해야 한다.
향후 노동자 자신이 주도하는 개인적인 교육 훈련에 대한 수요와 필요성이 늘어나며 이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인 바, 개인적인 교육 훈련 참여가 어려운 주된 원인은 시간 부족에 있다.
이러한 수요에 대한 직접적인 정책 대응은 직업훈련을 희망하는 구직자와 노동자의 '시간 지원'에 관한 제도 도입이다. 이를 위해 임금 노동자가 직업 능력 개발에 참여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훈련 휴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개인적 교육 훈련을 위한 일시휴직 제도의 정비, 교육 훈련 비용의 자기 부담에 대한 금융상의 지원, 개인적 교육 훈련으로 직업 능력을 향상한 자에 대한 기업 내에서의 처우 보장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