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현지시간) 런던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열린 찰스 3세의 대관식은 1953년 어머니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이후 70년 만에 열렸다. 사진에서 왼쪽은 이날 대관식에 참석한 찰스 3세, 오른쪽은 1953년 6월 2일 대관식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모습.
연합뉴스
찰스 3세 대관식에서 선보인 "오래된 술병"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건 1953년 6월 2일 진행된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과의 비교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국 국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진행하고 성유를 바르는 등 종교성 짙은 의식은 동일했으며 신, 정의, 사랑, 자비 등 큼직큼직한 개념들이 사용되었다.
1300년대 전설이 담긴 의자부터 시작해 1821년 조지 4세를 위해 제작된 예복, 장갑, 보주(orb), 홀(scepter), 보석의 향연으로 1661년에 만들어진 왕관까지 시각적으로 수백 년 전의 모습을 재현했다.
새롭게 담아야 하는 술은 국왕마다 다르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텔레비전 생중계 수용이었다. 당시 막 보편화되기 시작해 영국은 약 270만 세대가 흑백 TV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국영방송 BBC는 생중계를 제안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별것 아니지만 당시 TV를 저급 매체로 간주했던 이들은 대관식의 신성함이 떨어진다고 반대했고 여왕도 실수에 대한 부담과 자신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걸 꺼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여왕의 대관식은 성공적이었다.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된 대관식을 보기 위해 최신 매체인 TV 앞에 모여든 사람이 약 2700만 명으로 당시 성인의 56%에 해당한다.
사회적 상황도 좋았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패전국 독일만큼 모든 제도를 뒤집지는 못했지만 국가 의료보험, 임대주택, 각종 사회보장 제도, 철도 항공 및 기간 산업의 국영화 등 전후 복지 국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여왕은 전쟁의 피로감 속에 전후 질서에 대한 사회적 구심점으로 기능하면서 개혁이 가지고 오는 빠른 변화 속에 안정감을 주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받는다.
"나의 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