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성은 절대로 모든 사람을 향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는 학생들에게 ‘사람을 다르게 대해도 된다’는 신호를 준다.
참여사회
[키바 프로그램] 키바 코울루, 괴롭힘에 맞서는 학교
지금이야 세계적인 대안 모델로 꼽히지만
핀란드도 한때 학교 폭력이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2004년 WHO(세계보건기구) 조사에서 11~15세 아이들에게 학교 생활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34개 나라 가운데 가장 낮게 나타나 충격을 안겨줬다. 핀란드 정부가 70억 원의 예산을 들여 투르쿠대학교에 학교 폭력 예방 프로그램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했고 2년 동안 시범 운영을 거쳐 도입한 게 키바 프로그램이다.
키바 코울루(KiVa Koulu)는 괴롭힘에 맞서는 학교라는 의미다. '키바(KiVa)'는 괴롭힘에 맞선다(Kiusaamista Vastaan), '코울루'는 학교를 말한다.
키바 프로그램은 1년 동안 진행되는 20시간 분량의 커리큘럼으로 구성돼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구체적인 대응 전략을 생각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교사 3명이 팀을 구성하고 단계별 대응 방안을 학습한다.
키바 프로그램은 크게 일반 지침(general actions)과 문제 해결 지침(indicated actions)으로 나뉜다.
일반 지침은 첫째, 방관자의 역할을 생각해 보게 하고, 둘째, 피해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하고, 셋째, 피해 학생을 도울 수 있는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게 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문제 해결 지침은 실제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대응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다. 2~4명의 동료 학생들이 참여해서 프로그램 진행을 돕게 된다.
일반 지침이 모의 훈련이라면 문제 해결 지침은 실전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박연진이 문동은을 괴롭히는 걸 김경란이 보고 신고했다면, 반 전체가 모여 이 문제를 두고 토론을 진행할 수 있다. 아이들은 문동은의 입장에서 이 상황이 왜 잘못됐는지 이야기할 수 있고 박연진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의견을 모을 수도 있다. 박연진이 아니라 문동은에게 힘을 실어주는 또래 압력을 끌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만약 박연진이 적절한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문동은이 아니라 박연진이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애초에 가해자의 징계나 퇴출이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키바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올베우스 프로그램에서도 학교 전체의 개입을 강조한다.
교사나 부모를 비롯해 어른들이 적절하게 개입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고자질이 아니라, 괴롭힘을 멈출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고발하는 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키바 프로그램의 핵심은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부당하게 괴롭힐 때 우리가 그걸 멈출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키바 프로그램은 토론과 협동 과제, 역할극, 게임 등으로 구성된다. 다른 프로그램과 구별되는 지점은 첫째,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자료와 행동 패키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터넷과 가상 학습 등 미디어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다. 셋째, 방관자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역할을 강조하는 걸 넘어 공감과 자기 효능감, 노력을 촉진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키바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키바 게임은 5단계로 구성된다.
로그인을 하면 "괴롭힘을 당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를 보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같은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옳지 않다고 말한다", "선생님에게 이야기한다", "다른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같은 답변을 선택해야 한다. "모른 척 한다", "자리를 피한다" 같은 답변을 선택하면 다시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구출하는 게임도 있고, 선물을 던지면서 친구를 격려하는 게임도 있다. 간단한 게임이지만 퀴즈를 풀면서 핵심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핀란드 에스포의 카람지닌초등학교는 키바 프로그램을 도입한 첫 해에 학교 폭력이 67%나 줄었다. 2800개 학교 가운데 90% 정도가 이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1000개 이상 학교에서 학교 폭력이 의미 있는 정도로 줄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피해 학생의 98%가 상태가 좋아졌다고 답변했다는 분석 결과도 있었다.
경희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병찬은 핀란드의 경험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키바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연구를 기반으로 만든 프로그램이다. 당장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졸속 정책을 내놓으면 현장에서 외면하게 된다.
둘째, 처벌 위주가 아니라 교육 위주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대화와 토론으로 개선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되면 그때 처벌을 논의해도 충분하다. 처벌은 응징이 될 수 있지만 변화는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셋째, 환경을 바꾸는 게 목표다. 학교 폭력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로 봐야 한다. 방관자들의 방관적 태도를 바꾸는 게 핵심이고 해법도 집단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넷째, 교사를 믿고 맡긴다. 키바는 철저하게 교실에서 진행하고 교사가 주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