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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 하나를 셋이 나눠 먹다 깨달은 사실

인류를 이끈 '첫 입'이라는 희생

등록 2023.05.03 11:16수정 2023.05.0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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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쨍한 햇살에 그림자의 경계가 유독 뚜렷하던 3월의 주말, 오랜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J, H와 함께 점심을 먹고 보드게임을 하러 이동하던 중에 와플 가게가 레이더망에 걸렸다.

아, 잠시 소개를 하자면, 우리는 같은 동네 출신으로 초등-중학교와 동네 교회도 함께 다닌 오랜 친구들. 고등학교만은 제각기 다른 학교로 진학했는데 마침 진학한 학교가 모두 여고였다. 죄다 여고 출신인 우리에게 와플 가게란 참새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과 같았으니, 그렇게 '와플 구매 건'은 졸속 추진되었다.

밥을 먹은 직후였기 때문에, 1인 1와플을 외치는 뜨거운 가슴을 애써 달래며 대신 맛있는 와플 1개를 사서 셋이 나눠 먹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한 초코 생크림 딸기 와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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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베어문 와플, 끄트머리엔 빵 뿐. ⓒ 황은비

 
우리는 주변 공터에 앉아 나눠 먹을 준비를 했다. 와플을 들고 있던 J는 '먼저 먹을래?'라며 달콤한 첫 입을 양보했지만 당시 짐 정리로 바빴던 나와 H는 '아 괜찮아, 너 먼저 먹고 있어'라고 대답하며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 한 줄 알았으나... 미처 몰랐다. 그날 와플의 끄트머리에는 생크림과 딸기가 없이 빵만 있었다는 사실을.

J는 "첫 입은 희생이다"라는 말과 함께 빵을 우걱, 하고 베어물었다. 그 말 뜻을 한 입 베어문 와플을 보고 나서야 깨달은 나는 그 대사의 장렬함에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더랬다.

J의 희생 덕에 생크림과 딸기가 골고루 나뉜 부분만 먹은 나는 와플을 먹는 내내 그 말을 우물우물 곱씹었다. 그녀와 헤어질 때 즈음에는 왠지 J의 말이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를 지탱해온 근간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첫 입으로 '시작된' 인류의 역사

한 번 생각해 보자. 독버섯이 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어떤 풀은 병을 낫게 한다는 것은? 당신의 입에 들어간 커피와 껌이 안전하다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오늘 먹은 감기약과 두통약이 병을 낫게 할 것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아는가?

인류의 생존기를 거슬러 올라가, 나는 오랜 옛날 산으로 들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선 인류가 되어 본다. 쓸만한 무기라곤 돌 뿐인 상황에서 짐승은 너무 빠르고 위험한 선택지다. 몇 차례 작은 동물을 잡아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 결국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먹을 만한 풀과 열매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어떤 열매는 냄새가 고약하고 맛도 없게 생겨서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그 중 유독 빛깔이 곱고 달큼한 냄새가 나는 것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에 그걸 먹고 죽은 동물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겠지만, 그런 힌트가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무모하게 한 입 맛보는 것 뿐.

그리고 그런 무모한 이의 결말에 관한 기억이 모이고 전달되어 남은 이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해냈을 것이다. 그렇게 인류의 모든 생존은 바로 최초의 한 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첫 입으로 '이어진' 인류의 역사

첫 입의 희생은 무지(無知)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위험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담대히 첫 입을 희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미 상궁처럼,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건 그런 첫 입은 안타까운 대담함으로 인류의 역사를 이어 왔다.

비단 인간의 역사 뿐 아니라 개인의 역사도 그런 첫 입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장염을 앓았던 어느 겨울, 뜨거운 죽을 내 입에 넣기 전 '후후-' 불어 당신의 입술에 대고 온도를 확인하시던 어머니의 첫 입과, 매콤한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자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가며 만든 닭발 소스가 내 입맛에 맞을지 찍어 먹어보시던 아버지의 첫 입이 그랬다.

첫 입의 희생은 내 역사에 고스란히 녹아 콩을 골라 먹던 동생을 위한 첫 입으로 다시 나타났다. 콩자반과 비지찌개를 먹을 때면, '잘 봐-' 하며 일부러 더 맛있게 먹어서 동생의 숟가락을 이끌어 냈다. 그 희생 덕분인지 동생은 성인이 된 지금도 밥에 들어간 콩은 잘 먹지 않지만 콩자반 만큼은 맛있게 먹는다. 첫 입의 희생은 그렇게 대대손손 이어지나 보다.

한편 어떤 첫 입의 희생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 같이 음식을 먹을 때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인내의 모양으로, 가장 허기진 사람에게 첫 입을 내어주는 양보의 모양으로.

얼마 전 시청했던 <하하버스>라는 프로그램에서 막내 송이가 오빠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나눠주던 모습은 (비록 첫 입은 아니었지만) 그런 희생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의 당신은 어떤 첫 입을 경험하셨는가. 누군가로부터 받은 첫 입의 희생이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내어준 첫 입의 희생이 있을 수도 있겠다. 가끔 생각과 다른 희생의 부담과 불공평함을 경험하더라도 너무 언짢아하지는 마시길. 당신의 희생으로 인류의 역사가 연장되었으니까!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음식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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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사랑이 이긴다고 믿는 낭만파 현실주의자입니다. 반건조 복숭아처럼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구석이 있는 반전있는 삶을 좋아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모순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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