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대전현충원에 잠드신 홍범도 장군님을 만나 뵈었다.
오창환
일전에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에서 연락이 왔다. 기념사업회는 1년에 네 번, 분기별로 소식지를 발간하는데 앞으로 당분간 소식지 표지를 어반스케치 그림으로 했으면 좋겠으니 사업 내용에 적절한 그림을 선택해서 현장에 가서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기사로 소개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사실 나도 홍범도 장군 기념 사업회 회원이라 기꺼운 마음으로 그러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 잡지에 실릴 첫 번째 스케치는 대전 현충원에 모셔진 홍범도 장군 묘역을 그리기로 했다.
홍범도 장군님은 1868년 평양 인근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당신 또한 머슴으로 생활하다가 16살에 군에 나팔수로 입대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1897년 이후 산짐승을 사냥하는 포수가 되었는데, 조선 군대가 해산되고 일제가 민간인이 사용하던 총기류를 압수하려 하자 산포수를 규합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홍범도부대는 갑산과 해산진·북청 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한일합병 후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이주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결성하였으며, 갑산군 금정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독립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1920년 6월에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맞이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며, 10월에는 청산리전쟁에 참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부대를 이끌고 흑룡강 자유시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으나, 러시아 측의 배반으로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된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어 이곳에서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76세로 사망하셨다. 2021년 광복절 카자흐스탄에서 봉환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됐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25일 아침에 눈을 뜨니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스케치를 뒤로 미룰까 하다가 이미 기념사업회 대전모임과 약속도 있었고, 비가 곧 그치겠지 생각하고 대전행 KTX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읽은 책은 이 여행에 가장 어울리는 책으로 송은일 작가가 쓴 소설 <나는 홍범도>다.
홍범도 장군은 항일 투쟁을 하면서 어찌나 신출귀몰 했던지, 일본군이 그를 날으는 장군(飛將軍)으로 부를 정도였다. 장군님은 항일 무장투쟁을 하기 전에는 함경도에서 포수를 하면서 호랑이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사람들은 호랑이에 대한 경외심으로 호랑이를 비호(飛虎)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여러모로 홍범도 장군님은 호랑이 같으시다.
기념사업회 측과의 약속이 1시 반이었지만, 오랜만에 대전에 가는 길이니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대전역에 도착하니 10시다. 대전역에서 606번 버스를 타고 이응노미술관에서 내렸다.
이응노미술관에는 마침 4월 25일부터 8월 13일까지 <70년 만의 해후: 이응노와 박승무> 전시를 하고 있었다. 동양화의 현대화에 천착한 고암 이응노(1904~1989)와 전통회화를 고수한 심향 박승무(1893~1980)의 전시다. 고암 선생님은 젊은 시절 전주에서 간판점을 운영하셨는데 가게 안에 심향선생님 사무소를 두고 개인전도 도와주셨을 정도로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그래서 두 분의 관계에 착안해 만든 전시다.
현충원 가는 길에 미처 예상치 못한 이런 좋은 전시가 있다니! 티켓을 끊고 미술관에 들어가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응로미술관에 들어서니 은은한 나무 향기가 느껴져서 어디서 나는 냄새인가 하고 봤더니 미술관 천장과 벽 일부를 나무로 만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