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노부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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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출신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67)에 주목하는 이유는 2차대전 말기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농상무성대신을 지냈고, 전후, 극동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로 3년 반 투옥됐는데, 한국전쟁과 냉전의 영향으로 석방돼 일본의 고도경제성장 초기인 1957~1960년 총리를 지냈고, 전후 일본의 정치경제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기시는 총리가 되기 전, 1956년 이시바시(石橋) 내각에서 부수상 겸 외상으로 입각해 외교소신을 표명했다. 이듬해, 기시는 총리로 취임한 후 일본의 외교3원칙에 소신을 반영시켰다. 첫째 국제연합중심주의, 둘째 자유주의 국가와의 협조, 셋째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을 발표했다.
일본외교사를 되돌아볼 때, 외교3원칙은 서로 모순되기도 하지만, 균형을 갖고, 일본 외교의 중요한 원칙으로 설정됐다. 먼저 국제연합의 명명에는 일본과 독일 나치에 대한 연합국의 단결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어 일본과는 불편한 관게로 시작하지만, 전후 오히려 국제연합을 일본 외교의 중심에 두면서 받아들이려 했다.
자유주의 국가와의 협조는 서구,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강조하는데, 수출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정치·군사적으로는 미일동맹으로 뒷받침해 왔다. 기시는 미일동맹을 대등한 동맹으로 개선하기 위해, 미국에 반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안보상의 이유로 대미의존의 자세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일본이나 한국이 반공을 강조해온 것은 미국이라는 뒷배가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57년 당시 기시 총리는 아직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동남아시아 각국을 방문하면서, 배상교섭을 통해 경제에 역점을 둬 화해를 이끌어 내려고 했다. 동남아시아를 방문한 다음, 미국을 방문하는데, 오늘날 미중대결 속에서 일본의 외교를 전개하는 듯한 중국을 포위하는 반공외교가 전개되고 있었다. 가까운 이웃나라 중국과 한국과는 아직 거리감이 있던 시기였다. 수상으로 취임 후 일본을 방문한 한국 외무부 김동조 차관에게 다음과 같이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막부시대부터 조슈의 하기(萩)항은 조선과 많은 무역 거래를 했고, 그 때문에 조슈에는 많은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나 또한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보다(久保田) 발언 파문'(일본의 조선 통치를 미화)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됐던 시기, 기시는 총리로 취임 후 한국과의 관계회복에는 험한 길을 있을 것이라 예상하면서 국교정상화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기시 노부스케와 통일교회
기시 노부스케와 구통일교회(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와의 관계는 3대에 걸쳐 이어져 왔는데, 아베 전 총리의 피살로 그 관계에 의문을 갖게 된다.
기시와 구통일교회와의 밀월관게는 반공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이념적인 공통분모를 모색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통일교회는 1964년에 일본에서 종교법인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기시의 바로 옆집에 본부를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