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참여연대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4·16연대 상임집행위원장,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태호입니다."
- 어떤 계기로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학생운동이 시작이었죠. 학생운동을 8년 정도 했어요. 학생운동을 일찍 끝낸 동료들이 참여연대가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였을 시절부터 준비위원회에 참여한다고 했어요. 당시 저 역시 새로운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에 함께하게 되었는데 벌써 28년째 활동가로 일하고 있네요. 특히 처음에는 권력의 부정부패를 상대로 한 운동을 하고 싶어서 권력 감시를 표방한 참여연대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아요. 참여연대에 와서는 부패방지법 제정운동, 낙선운동 등을 하다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권력이 남용되는 모습을 보며 안보권력감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 주 업무를 맡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죠."
- 사회적 참사와 관련된 활동들을 꾸준히 해오셨네요. 4.16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은 어떻게 맡게 되신 건지 궁금해요.
"세월호 참사가 있던 해에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이었어요. 국가는 국민이 모여서 구성한 건데 추상적인 개념인 국가의 안보는 걱정하면서 시민 개개인의 행복과 안전은 등한시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있어요. 참여연대는 세월호 참사 이전부터 시민 중심으로 국가 권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는데, 참사가 발생하고 당시 대표였던 이석태, 임종대 전 대표, 박래군 소장과 함께 팽목항을 방문했어요. 유가족,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과 만나서 어떻게 이 문제에 대응할지 논의하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를 만들었어요. 유가족들과 협력의 틀을 만들며 운동을 하다가 장기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단체를 꾸리자고 의견이 모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약칭 4.16연대)입니다. 그 안에서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진상규명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했네요."
- 활동하시면서 가장 힘드셨던 일은 어떤 일이었을까요?
"세월호참사 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야가 협상해서 겨우 법을 통과시켰어요. 그런데 정작 정부가 내놓은 시행령이 오히려 특별법을 왜곡했죠.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느꼈어요. 시행령을 법에 위배되게 만들며 노골적으로 특별조사위원회(아래 특조위) 활동을 방해한 거잖아요. 이석태 전 참여연대 대표가 첫 특조위 위원장이셨는데 특조위가 강제해산 되는 바람에 단식농성까지 하셨어요. 유가족분들도 화가 많이 나셨죠. 여야가 가까스로 합의한 내용을 정부가 완전히 무시하고, 예산도 주지 않으면서 규모는 계속 축소시키려고 하니까요.
시행령은 확정되지도 않았고 임용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활동하지 않은 기간까지도 합쳐서 특조위 기간이 다 됐다고 강제 해산하는 건 도리가 아니죠. 목적에도 어긋나고요. 이 사건은 2심에서 책임자들에게 무죄가 선고돼 지금 대법원에 계류되어 있어요. 이밖에도 유가족들이 청와대 옆, 광화문에서 농성하시고 영정을 들고 행진도 하셨는데 기절하는 분이 생길 정도로 화가 나는 일들이 있었죠. 그렇게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볼 때 정말 마음이 아팠고 국가에 실망하게 돼 힘들었어요."
- 기뻤던 일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소개해주세요.
"가족들이 제안하고 시민단체가 연대해서 진상규명을 위한 독립적 조사 기구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처음 나왔던 때가 기억나요. 지금 이태원참사에서도 비슷한 요구를 하잖아요. 세월호 참사는 이전에는 그런 요구를 한 사례가 이전에 없었어요. 해외 사례로만 보았던 특별법을 통해서 독립적 조사 기구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이죠. 그때는 여당이고 야당이고 도움을 받기 어려워서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는 압도적인 시민들의 요구가 필요했어요.
처음엔 '이게 될까' 싶었지만 5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 진행한 서명운동에 350만 명이 참여한 거예요. 한국 사회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죠. 그 서명 용지를 416개의 박스에 담아서 특별법을 만들어달라는 행진에 2000여 명이 참여해서 국회로 갔어요. 국회는 행진 금지구역인데 청원 서명 용지를 전달하기 위한 방문이었기에 가능한 걸음이었죠. 사람들이 함께 많이 공감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연대한 시민들이 최소한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그냥 두지 말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느꼈을 때 벅찼어요."
- 세월호 참사 이후에 또다시 10.29참사와 같은 인재가 발생했는데 이런 참사에 함께 대응하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참사가 반복되는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신자유주의 말기라고 볼 수 있는 지금 사회에서 재난은 일상화되었어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기후위기시대에 도래하면서 재난은 규모도 더 커지고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발생하기도 해요. 국가의 역할을 공동체 보호가 아닌 단기적이고 재정적인 성장, 경제 활성화, 이윤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소수 특권층의 이익과 안전만이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됐어요. '바이러스는 평등하지만 그 피해는 불평등하다'라는 말이 있듯, 재난 대응 과정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국가가 보호하는 대상도 한정된 것이죠. 이렇게 국가의 공공성 자체가 약화되니 재난은 커지고, 예측 불가능하며, 반복되는 것이죠.
세월호 참사 때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사회적 약속을 지키고 침몰하는 배 안에서도 연대를 실천하며 시민성을 발휘한 사람들이 오히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선장 때문에 희생됐죠. 이 사건은 개인의 안전불감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안전을 충분히 보장해야 하는 책무를 다하지 않은 국가에 책임을 묻는 동시에, 그런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의 시작이었어요.
시민들이 스스로를 우연이 만든 생존자이자 언제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을 하는 것, 이 자각은 사회운동에서 큰 동력이 돼요. 사회와 국가의 역할을 명확히 하려는 각성이 사회와 국민의 책임을 구조적으로 형성하고 규범으로 확립되는 것이죠. 부조리, 부정의에 가만히 있지 말자라는 각성이 일어나 시민들이 협력해서 진상규명, 재발방지대책을 세우고, 생명과 안전에 대한 감수성과 의식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어요.
한국은 점점 재난이 심각해지는 위험사회로 변해가고 있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움직임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건 단번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재난은 또 일어날 수 있어요. 그리고 시민들은 앞선 재난의 교훈대로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시민의 안전권과 피해자의 권리를 존중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죠. 이렇게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야하는 게 맞는데, 이태원 참사에서는 오히려 2차 가해가 있었죠.
이런 부분이 참 절망스러웠는데 이런 일이 다시 생긴 이유는 지금 정부가 세월호로부터 나온 교훈을 애써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세월호 참사로 인해 가까스로 우선순위가 되었던 안전을 정부가 다시 후순위로 미루며 효율, 이윤을 앞세운 거죠. 그럼 당연히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요. 단순히 반복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참사의 규모는 더 커질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스스로 우연한 생존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 사회적으로 신뢰가 부족해지거든요. 그럼 자연스레 연대보다는 각자도생의 논리를 따르며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칠 거예요. 이게 또 다른 재난의 원인이 되는 것도 무리한 예측은 아니죠. 우연에 맡겨지는 일들이 많으면 안전과 관련한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아서 사회적 행동과 국가적 책무 이행도 힘을 잃어요.
이런 사회적 신뢰 상실은 복지와도 무관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봅시다. 국가가 내 안전한 노후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국민연금을 신뢰하고 낼까요? 아니겠죠. 결국 각자도생이 미덕이 된 사회에서 이익을 보는 건 각자도생을 선택한 개개인이 아니라 사보험 시장이에요. 이런 게 재난자본주의의 매커니즘이죠. 사회적으로 형성된 불안함을 이용해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사적 이익을 취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요. 이런 악순환은 사회적 불평등으로도 이어져요. 공공성이나 공적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화될 수밖에요."
"책임은 개인에게? 재난 서사를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