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임시의정원 의원 일동(1942.10.25). 가운데가 문일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충칭에서 맞이한 해방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그러나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으로 맞이한 '준비되지 않은 해방'은 임시정부가 넘어야 할 또다른 산이었다.
해방 직후인 8월 17일 개원한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입국 문제와 새 정부 수립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때 문일민 등 신민당 의원들은 국무위원 총사퇴 후 과도내각(看守內閣) 조직을 주장했다.
앞서 이들은 해방이 확실시되자 "대한민국의 주권을 27년 이래 임시정부 소재지에 거주하는 독립운동자만이 행사해 온 것은 과거의 정세 아래 있어서도 부당한 일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왜구의 무조건 투항으로 인하야 우리의 조국이 해방되게 된 이때에 있어서는 임시정부 소재지에 거주하는 독립운동자만이 독점하는 소위 대표제를 더 존속시킬 필요도 가능도 없었다"라고 해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정지하고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그 권한을 봉환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전국 인민의 의지에 의한 전국 통일적 임시정부가 국내에서 건립될 것은 명백하다. 충칭 임시정부가 전국 통일적 임시정부로 자처하며 인민들의 의지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국내 인민이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부와 그 인물을 선택하는 데 지장이 될 것은 명백한 일이므로 임시정부의 정권을 국내 인민들에게 봉환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임시정부에 대한 파괴행위로 인식한 한독당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신민당의 제안은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8월 23일 부로 임시의정원이 무기 휴회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입국 및 입국 후 정국 수습방안은 한독당이 이끄는 국무위원회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해방 전후로 문일민은 충칭 임시정부·임시의정원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한독당 중심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확대 개조 등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비록 문일민 등의 혁신운동이 한독당 중심 구조를 뒤집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한계로 지적될 수는 있다. 그러나 연합국의 전후 구상에 발맞춰 한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새 정부 수립을 위해 선구적인 대안을 제시했고 그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