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제주비건축제제주비건축제에 참여한 채소 부스
김연순
나는 생선의 눈이 무섭다. 말도 안 되지만 익은 생선은 잘 먹으면서 생물 상태, 심지어 냉동된 상태의 생선 몸통도 무서워 만지지 못한다. 아이들 어릴 때, 좋아하는 생선이나 고기를 해줘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잘 피해 갔다. 주로 남편이 하거나 친정엄마의 도움 그리고 아이들이 커서는 아이들이 직접 생선을 씻고 굽곤 했다.
내 어릴 적 부모님은 주말이면 큰 도매시장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무거운 짐을 들어줘야 해서 나도 가끔 따라 나섰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서울의 큰 시장 여러 곳곳을 다녔던 것 같다.
중부시장에선 북어, 김, 마른새우 같은 건어물류를, 가락시장에선 생선, 오징어 같은 해산물류를, 광장시장에서는 설탕이며 비누, 휴지 같은 생활용품을 장만했다. 무얼 사건 웬만하면 궤짝으로 샀고 커다란 대형 비닐봉투에 한가득이었다.
부모님은 맏딸인 나와 내 밑으로 한두 살 터울인 아들 셋을 나아 키우셨다. 복작복작했고 늘 시끄러웠다. 한창 먹어 제끼는 먹성 좋은 남자 아이들 셋과 지방에 사는 큰고모 아들까지 우리집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은 어딜 가나 사람으로 그득한 느낌이었다.
전기밥솥 한가득 밥을 하면 한끼에 없어졌고 계란은 한판이 금세 동이 났다. 국도 냄비는 물론 들통으로 하나 가득 끓여도 얼마 못 가 바닥을 비웠다. 우리들이 고등학교 다닐 땐 도시락 두 개씩 싸 다녔고 같이 밥상에 앉으면 경쟁이라도 하듯 먹어댔다. 그많던 식재료들은 얼마 못 가 사라졌고 다시 장을 봐야 했다.
무거운 짐을 들려면 내 손이라도 필요했기에 부모님은 종종 나를 대동하고 가셨다. 나는 장보기에 동행하는 것이 맏이로서 대우받는 것 같아 내심 기쁘고 뿌듯했다. 시장에 가면 온갖 먹을거리가 지천이었고 간혹 군것질도 하며 다녔다.
주도권은 없었지만 계속 대량으로 사려는 엄마를 그만 사라고 만류하는 역할도 했다. 다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어깨는 무거웠고 힘은 들었지만 어른의 대열에 끼었다는 자부심이 있어 그닥 싫지는 않았다.
문제는 어물전이었다. 온갖 생선들이 즐비한 곳을 지날 수밖에 없었는데 몹시 괴로웠다. 살아 있건 죽어 있건 냉동되어 있건 그 많은 생선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웠고 징그러웠다. 움직이는 생물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붉은 덩어리의 소고기, 돼지고기 파는 정육점도 몸뚱이 그대로 드러난 닭을 파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시체들 사이를 지나는 느낌이었고 소름끼치는 시간이었다. 가급적 바닥을 보며 걷거나 부모님이 거기서 뭔가 사려고 하면 좀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 때론 아예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기다렸다.
내가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그 아이들이 훌쩍 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생선과 고기를 만지지 못한다. 시장에 가도 피할 곳은 피해 다니며 예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생선과 해산물은 먹지만 오래전부터 육류와 가금류는 먹지 않는다.
아주 어릴 때 엄마가 손으로 뜯어주는 삼계탕의 살코기, 당면 넣은 국물 자작한 불고기 먹었던 기억은 난다. 그런데 초등학교 2,3학년 무렵의 어느 날,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요일에 성당을 가려면 꽤 먼 거리라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에서 흔들거리며 가던 중에 무심코 보니 차창 밖으로 멀리 커다란 하얀집이 보였다. 옆에 있던 사람에게 저 건물이 뭐냐고 물었다. 도축장이라고, 소를 잡아 고기를 만드는 곳이라는 답을 들었다.
순간 아득했다. 아, 내가 맛있게 먹었던 불고기가 살아있는 동물이 죽어서 만들어진 거로구나. 그걸 알게 된 후로 난 먹을 수가 없었다. 상상속에서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가 자꾸 떠올랐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니 소들이 너무도 불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