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터스 빌딩의 인도 국기
Widerstand
그러나 한편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는 다른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영국 지배의 중심이었던 콜카타와 벵골 지역은, 한편으로 인도 독립 세력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식민지배와 함께 성장한 근대적 교육과 문화는 벵골 지역에서 지식인들의 성장을 불러왔죠. 소위 '벵골 르네상스'라 불리는 일련의 운동이었습니다.
인도 사회의 개혁을 외치며 근대화와 악습 철폐, 영국에 대한 저항을 주장한 람 모한 로이는 벵골 르네상스의 시조로 불리죠. 아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기탄잘리>의 타고르 역시 벵골 르네상스의 주역입니다. 자가디시 찬드라 보스와 같은 과학자들도 성장했고, 비베카난다와 같이 힌두교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당시 콜카타는 런던에 이어 대영제국 제2의 도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영국식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서구식 근대 교육의 도입, 무굴제국의 문화적 영향, 토착 문화의 부흥 운동, 힌두와 이슬람이 섞인 인구 요인 등이 결합하며 급격한 정치적 성장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도 국민의회가 반영 운동을 개시하게 되는 계기가 '벵골 분할령'이었다는 사실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벵골 분할령'은 영국 정부가 벵골 주를 힌두교 지역인 서벵골과 이슬람 지역인 동벵골로 분할하겠다고 선언한 사건입니다. 인도인의 분열을 노린 조치였죠.
이를 계기로 원래 영국에 협력하고 있던 인도 국민의회는 자치와 영국 상품 불매를 포함한 강령을 채택하고 반영 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영국이 1911년 벵골 분할령을 철회한 뒤 수도를 델리로 옮기는 것도, 이 반영 운동의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한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