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전자공고 임동헌 교사
김동규
-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광주전자공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27년차 교사 임동헌입니다. 그동안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요새는 길을 잃은 것만 같습니다."
- '현장실습' 제도란 무엇인가요?
"1963년 산업교육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시작됐습니다. 일할 사람보다 일자리가 더 많던 경제성장기에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더 어린 노동자들을 쓰려고 취업 연령을 고등학교까지 낮춘 겁니다. 김영삼 정부는 '2+1'이라고 해서, 3학년 학생이 1년 동안 현장실습을 가면 출석한 걸로 보고 졸업장을 줬습니다. 사실상의 조기 취업 제도였습니다. 이후 '2+1' 제도는 비교육적이라는 비판이 일어 축소되지만 현장실습 제도는 여전히 시행 중입니다."
- 현장실습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지난 2002년 당시 광주기계공고의 취업담당 교사였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사회생활이 녹록지 않다. 인생이 원래 그렇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전북 남원의 한 자동차기업 협력업체로 학생 5명을 현장실습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중 4명이 보름도 안 돼서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남은 학생은 굉장히 내성적인 학생이었는데, 이틀 뒤에 그 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너무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출장을 내고 남원에 갔습니다. 공장에 가니, 멀리서 검은 물체가 다가왔습니다. 온몸이 까맣게 칠해진 그 학생이었습니다.
공장에서 학생에게 플라스마 용접을 시켰는데, 그 용접은 쇳가루가 많이 날려서 밀폐된 공간에 손을 넣어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비싸기 때문에 그냥 하라고 했습니다. 학생이 저를 보고 장갑과 마스크를 벗는데 손과 얼굴이 온통 검었습니다. 분진이 안 들어가는 방진마스크 속까지 까만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고 숙소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건물 옥상 컨테이너로 안내받았습니다. 문을 열자 용광로처럼 뜨거운 공기가 나왔습니다. 이불이 엉켜있고 선풍기만 두 대 있었습니다.
여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학생에게 짐을 챙겨오라고 하고 회사 부장을 만났습니다. 부장은 저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이게 뭐 하는 거냐'고 받아쳤습니다. 그러자 부장은 비아냥거리듯, '선생님, 사회가 학교처럼 편하지 않아요. 전쟁텁니다. 앞으로 광주 기계공고 학생들은 안 뽑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학생과 함께 광주로 돌아가는데, 아무 말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뭔가, 학교와 선생님을 원망하는 기운 같은 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2003년에 전교조 광주지부 실업교육위원회가 창립돼, 다른 선생님들과 현장실습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실습을 보냈는데 어떤 학생은 지게차에 치여 죽고, 어떤 학생은 승강기에 끼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런 사례가 너무 많았습니다. 이때 큰 충격을 받고 '아, 이건 교육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현장실습 폐지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 2009년에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를 만드셨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어리고 힘없다는 이유로 심각한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는 지역 청소년들의 노동인권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광주의 16개 시민단체와 함께 단체를 창립해 현장실습 등 청소년 노동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 12월에 기아차 광주공장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당 최대 70여 시간 근무한 현장실습생이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까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 18세 학생이 쓰러진 이 문제를 지역의 이슈로 만들기 위해 거리에 나섰습니다.
당시 특성화고 3학년들은 1학기 수업을 마친 후부터 실습을 나갔습니다. 이에 기업은 상반기에는 전문대 실습생들을 쓰고, 하반기에는 특성화고생들을 썼습니다. 상시 고용으로 채워야 할 자리를 실습생으로 채운 겁니다. 실습생들은 정규직들은 하지 않는 '기피 업무'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인건비를 크게 절감해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사건 직후인 지난 2012년 1월 정부가 기아차 광주공장 특별근로감독 실시로 확인한 체불임금 및 미지급 수당만 27억8000만 원이었습니다. 저희 측 노무사는 실습생들이 상시 근로자로 채용됐다면 이 금액은 90여억 원에 달했을 거라고 봤습니다. 이후에도 사고는 반복되었습니다. 그때마다 현장에서 '반짝 관심'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