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촌 묘소의 묘비석 뒷면. '모질고 풍진 세상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는 문장 옆에 '작은 시민'이라는 글귀가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서부원
그전까지만 해도 묘역은 찾는 이가 아무도 없어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백촌의 위대한 업적이 좌익 인사라는 오해와 말년의 가난으로 인해 지워지고 잊힌 것이다. 신분 해방과 평등을 추구했던 그가 숨을 거둔 1957년은 서슬 퍼런 반공주의가 사회를 옥죄던 야만의 시대였다.
묘소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시덕불망비(施德不忘碑)'도 눈길을 끈다. 곳간을 열어 주민들을 구제한 백촌 집안의 내력을 보여준다. 얹은 지붕돌은 물론, 빗돌의 마모가 워낙 심해 새겨진 글자조차 흐릿한데 그동안 백촌이 당한 온갖 멸시와 수모를 짐작하게 한다.
잊힌 백촌을 기억하고 묘소를 찾아 묘비석을 세운 탓일까. 김장하 선생은 한 시민으로부터 느닷없이 '빨갱이'로 내몰리기도 한다. 막무가내의 욕설에 발끈할 법도 하건만, 좀체 화를 내지도 않는다. 말로 대응하기보다 우직하고 일관된 행동으로 자신의 소신을 실천할 따름이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다.'
백촌의 묘소에서 새삼 형평운동의 정신과 김장하 선생의 철학이 맞닿아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제강점기 백촌이 열망했고, 지금 김장하 선생이 바라는 세상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회적 경제적 차별과 극단적인 이념의 대립이 없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곳간을 열어 주민을 구제하고 기꺼이 백정의 편에 선 백촌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학생들을 위해 기부를 실천해온 김장하 선생은 과거와 현재진행형의 역사가 되어 손을 맞잡고 있다. 인근 남가람공원에 세워진 형평운동 기념탑의 조형에 담긴 의미도 그렇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