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독립기념관
그러나 남의 나라 땅에서 군대를 운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41년 11월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군사위원회가 접수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을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9개준승은 광복군의 활동 구역·작전·조직·훈련·초모·편성 등에 있어 중국군이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임시정부와 광복군 입장에서는 매우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군사위원회의 통보에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9개준승의 접수 여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으나, 중국의 원조 없이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임시정부는 인통접수(忍痛接受: 고통을 참으며 받아들임)의 심정으로 일단 수용했다.
이는 중국군의 간섭과 통제로 이어졌다. 군사위원회는 광복군총사령부의 기구를 10개처(총무·참모·부관·정훈·관리·편련·포병공·경리·군법·위생)에서 3개처(참모·총무·정훈)로 대폭 축소했을 뿐만 아니라 4개 지대였던 단위부대 편제 역시 2개로 줄여버렸다. 또 군사위원회 소속 중국인 장교들을 광복군에 파견한 결과 총사령부 간부 중 80%, 광복군 장교의 55%를 중국군이 차지하는 꼴이 돼버렸다. 이는 중국군이 광복군을 거의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임시의정원에서는 주로 야당(조선민족혁명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굴욕적인 9개준승의 취소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35회 회의에서는 9개준승의 취소 내지는 수정을 거부하는 중국에 맞서 임시정부가 일방적으로 9개준승의 폐지를 선포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했다.
문일민은 대표적인 강경론자였다.
"의장! 광복군 9개준승 문제는 3년째 토론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까지도 죽어가지고야 어떻게 독립하겠습니까! 우리가 해외에 나올 때에도 9개준승을 받으러 왔습니까? 이 자리에서 죽어도 또 망국노 노릇은 못하겠습니다. (…중략…) 광복군이 근무병 하나도 마음대로 처리 못하리만큼 인사 문제의 자유가 없어가지고야 무슨 일할 자유가 있습니까? 부모처자를 버리고 여기 와서 고생하는 여러분이 이런 꼴을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정신만은 살아야겠습니다!" - 1943년 11월 15일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 당시 문일민의 발언
실제로 문일민은 신흥무관학교와 윈난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광복군총영·한국노병회·한국군인회 등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각종 군사조직에 관여했고 심지어 중국군에 몸을 담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광복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굴욕적인 9개준승에 종속되어 있는 광복군에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거부한 것이다.
문일민은 1943년 12월 1일 유림·강홍주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홍진 앞으로 다시 한 번 9개준승을 폐지하고 독자적인 작전 실시를 골자로 한 자주적인 신 협정을 3개월 내로 체결할 것을 건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