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에 귀환한 도산선생 묘비, 2016년 2월에 촬영했다.
이혁진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이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산공원에 도산 선생 묘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 2월, 도산선생 묘비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귀환한 지 50년을 맞는다.
1973년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이 개원하면서 도산의 유해와 묘비는 도산의 부인인 이혜련 여사 유해와 도산공원에 합장했다. 이후 당시 망우리 공동묘지(망우역사문화공원) 도산 선생 묘터에는 '도산선생 묘지터'라고 조그만 비석이 대신 세워졌다.
도산공원 도산 묘비는 2005년 한글 묘비로 새로 바뀌고, 기존의 묘비는 도산공원 내 도산기념관 지하창고에 보관됐다. 보관 중이던 묘비는 2016년 2월 망우역사문화공원 여상규 선생 묘지 옆으로 다시 왔다. 흥사단과 도산기념사업회가 묘비 귀환을 추진한 것이다.
도산은 서거 당시 망우리 공동묘지 태허 유상규(1897-1936) 지사 묘소 옆에 묻혔다. 유 지사는 3.1운동에 참여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도산의 비서관으로 활동했다. 도산이 세운 흥사단 멤버로도 활약했다.
도산은 1937년 흥사단 국내지부 격인 수양동우회 사건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지금 서울대 병원)에서 숨을 거두기 전 유 지사 묘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도산과 사제지간이기도 한 태허는 경성의전 외과의사로서 세균 감염으로 젊은 나이에 타계했지만 생전에 도산을 어버이처럼 섬겼다.
태허가 1936년 작고했을 때 도산이 그의 장례를 주관했을 정도로 둘 사이는 각별했다. 2년 후 도산 역시 죽어서도 태허를 정신적 아들이자 동지로 생각했다. 당시 도산선생의 장례는 일제 감시하에 극비리에 치러졌다. 일본은 요시찰 인물인 도산의 사망이 조선인들에게 분노를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거 당시 도산 유가족은 국내에 없었다. 이에 도산이 자식 같이 사랑한 태허 곁에 묻히길 원한 것은 어쩌면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사제지간은 사제지묘로 이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