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개 다섯 마리의 밤>에는 개 다섯 마리가 나오지 않는다.
은행나무
꼭 읽어보겠다던 약속은 해를 넘기고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즈음에야 지켜졌다. 첫 장을 넘긴 순간, 1라운드 땡! 소리와 함께 링 위의 복서가 상대에게 설렁설렁 다가갔다가 순식간에 어퍼컷 한 방 맞고 바닥에 뒹굴만한 충격이 글 위에 펼쳐졌다. 이어 쉴새없이 날아든 잽 융단 폭격에 혼비백산 넉다운 되듯, 작가는 선입견을 잣대 삼아 자신을 판단했던 독자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거침없이 질주했다.
소설에 개 다섯 마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추운 밤이면 개를 끌어안고 잤대. 좀 더 추우면 두마리, 세마리... 엄청 추운 밤을 '개 다섯 마리의 밤'이라 불렀대."
백색증(알비노)을 앓고 있는 아이. 육손을 가진 남자. 소수자이자 약자가 서로의 고통을 꽉 부둥켜 안고 의지한 채, 개 다섯마리를 끌어안고도 모자랄 타인의 경멸, 집단 따돌림이란 혹한을 견딘다. 육손의 남자도 끝까지 아이 곁을 지켜주지 못하고, 지독히 외로운 세상에서 알비노인 아이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겨우 12살의 자존심 뿐이다.
절박하리만큼 안간힘을 써가며 버텨보지만, 정작 아이보다도 나약한 자격지심과 마주하기 뜨끔한 가해자들은 더 집요하고 잔혹하게 아이를 벼랑끝으로 내몬다. "너무 힘들 땐 엄마,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고 싶어." 아이는 점점 가중되어 오는 폭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참아왔던 울음을 밖으로 솟구쳐 낸다.
그럼에도 작가는 가해자에 대한 복수도, 피해자에 대한 구원도 없이 아이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면케 한다. 처절하리만큼 아픈 소재를 타협없이 정공법으로 직진, 치열하고도 묵직하게 전개를 끌고가는 저력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각 인물들의 빈틈없는 서사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입체적이고 치밀한 구성까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억겁의 내공없이 가능할 수 있을까.
작금의 혐오사회에서 나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내심 멸시하나, 차라리 외면하나, 어줍잖게 동정하나. 어떠한 답도, 위로도 함부로 꺼낼 수 없는 무거운 침묵만이 흐를 뿐이다.
최근 드라마 <더 글로리>로 인해 집단 따돌림에 대한 이슈가 한창인 가운데, 정작 드라마의 본질인 피해 당사자의 아픔을 공감하기 보단, 대중적 재미 요소에 더 현혹되었던 건 아닌지 자문해본다. 소외된 약자들과 냉대한 인간사회 가운데서 쓸쓸한 한숨이 내쉬어지는 소설이었다.
겉모습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옛말은 하나 틀린 것이 없구나. 타인에 대한 선입견으로 일관했던 시간들이 부끄러워 책을 덮자마자 꾸벅 절하고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VIP시사회 때 다시 만난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