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2가 8번지', 아버지의 자리
전재천 포토디렉터
자그마치 58년이다. 그 긴 세월 이 동네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때론 고단했지만 행복했다. 함께 나이 들어갔다.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더 짧아져만 간다.
"돈을 못 벌어도, 적자가 나도, 나 죽을 때까지는 절대 문 닫지 마라. 목욕탕 해서 오 남매 다 학교 보내고 출가시켰다. 이제야 문 닫는 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목욕탕을 끝까지 지키라고,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한 10년은 돈벌이가 안 됐다. 좀 나아질까, 리모델링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속으로 '영감 웃긴다'라고 했어.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돌아가시고 장례 치른 다음 날, 바로 문 닫고 끝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6년 더 목욕탕 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 죽을 때까지 해야, 진짜로 지키는 거지..."
버티고 버텨오다, 이제 정말 끝이 났다. 이번 설을 기점으로 여탕도 문을 닫았다. 느리게 흐르던 시간마저 멈춘다.
여자들만의 '세계'
아차, 매주 수요일은 쉬는 날이다. '773-1013', 간판에 적힌 번호를 눌러도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기계음만 반복적으로 들려온다. 옆집 세탁소에 가서 도움을 청하자 선뜻 나서준다. 지나가던 한 할머니는 목욕탕 주인 만나러 왔느냐며 전화기를 꺼내 든다. 오래된 동네 목욕탕이 맞다.
"어이, 목욕탕~! 거 있어?" 고요한 골목을 흔들어 깨우는 세탁소 아저씨의 외침에 '세계목욕탕' 2층 창문이 드르륵 열린다. 유리문엔 수증기가 뽀얗게 서려 있다. 주인 홍경숙(67)씨가 얼굴을 내민다. 설 이후에 오겠노라, 약속한 날짜보다 이르게 찾아간 터였다. 얼굴엔 반가움보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닫힌 문을 활짝 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