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삼십 대 후반에 이르러 <소금꽃나무>를 다시 펼쳤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청년들은 자신을 몰랐으면 좋겠다"며 자신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이 졸속으로 처리되고 청년들이 산업현장에서 여전히 목숨을 잃는 지금도 그의 목소리는 유효하다. 언니께는 죄송하지만 자본의 불공정과 '갑질'로 몸과 정신의 피로를 겪는 친구들에게 <소금꽃읽기>를 계속 권하고 싶다. 이 마음조차 팬심일 수도 있지만.
김 위원은 동료의 등짝에 난 땀들을 '소금꽃'으로 비유한다. 영도의 조선회사에 입사하기 전 유년의 기억과 '거북선(배) 만드는' 동료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는 소금꽃 피우는 존재들을 구체화한다. 그의 오랜 선배인 박창수, 김주익 열사의 추모사를 비롯해 곁을 지켰던 동료들과 그이들의 가족들 목소리도 세밀하게 기록한다. 자신이 노동운동을 지속할 수 있게 옆을 지킨 시민들의 모습도 재현한다.
"사실 내 이름 뒤에 '씨'를 붙여서 불러 준 건 야학에서가 처음이었고 나한테 존댓말을 해 주는 최초의 사람들이 야학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야학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존감을 '업'시켜 줬던 야학의 존재와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고 유서를 남겼던 수많은 미경이,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존재를 복원해낸다. 하청이라는 말 대신 세 음절이 이뤄진 이름들을 선명히 불러 준다.
김 위원은 <전태일 평전>을 읽고 일의 세계와 타인을 자각했다고 밝힌다. "그들과 난 다르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던" 나날을 지샜던 그의 반성과 회사원이 되어 어려운 시절에서 벗어날 거라며 '노동'이라는 말에 거북함을 느꼈던 나의 반성이 다시 포개어진다. 억압이라는 족쇄는 느슨해지고 대신 공감의 자리가 태어난다.
하여 그에게 <전태일 평전>이 정신을 깨우는 도끼였다면 나에게는 <소금꽃나무>가 타인과 노동을 생각하는 나침반이 되었다. 자본이 교묘하게 당신이 불평등을 겪는 이유가 당신 능력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설득할 때, 이 책은 그 이면을 바라보라며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명징한 도끼가 되어 준다.
"자본의 발밑에 짓밟혀 파들파들 떨고 있는 민들레를 한 번 더 짓밟는 게 아니라 그 발을 치워 줘야 합니다. 민들레에게 너희도 시험 쳐서 소나무가 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민들레에게 숨 쉬고 씨앗 흩날릴 영토와 햇빛을 나눠 줘야 합니다. 민들레가 죽어가는 땅에선 어떤 나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밥그릇 싸움이 같은 밥을 놓고 싸우는 굴레라는 점을 인정할 때, 정규직의 미래가 비정규직이라는 우리 사회의 고용 현실임을 자각할 때, 이 책은 청년에게도 소금과 같은 감각과 '함께'의 통감을 건네준다. <소금꽃나무>는 청계피복 노동자 등 6월 민주항쟁의 주역에 가려진 소외된 노동의 자리를 비춰주는, 평범한 오늘을 사는 시민들의 여전한 고전이다.
외진 마음도 바다의 미래를 꿈꿀 수 있다
고백하건대 한 대학에서 열린 김진숙 위원의 강연에 참여한 적 있다. 모처럼 연차를 낸 평일, 대학 강당의 입구에 그가 나타나자 가슴이 뛰었다. 대학 교정에 가본 일도 처음이었다. 그가 마이크를 들고 강당에 서자 환한 아우라가 가득했다. '나 연예인 본 걸까?' 지금으로 치면 BTS쯤 본 듯한 설렘이 일었던 20대 초반 어느 오후의 일이다.
김진숙 위원의 강연은 열아홉에 일을 시작하고 직장생활 3년 차가 된 한 청년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당시 옆자리에 앉았던 또래 청년들의 대화를 기억한다. 어디 호프집에서 몇 시까지 만나자, 어디서 미팅할 거냐, 그 교수 어떻더라는 조크가 난무했다. 강연이 시작된 지 십오 분 정도 흘렀는데도 떠드는 분위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대학생이 아닌 청년 노동자가 모인 자리에서는 달랐을까.
해맑은 말장난과 웃음소리가 귀에 섞여 들어왔다. 지금이야 그럴 수 있지 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지만, 당시엔 홀로 '섬'이란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것 같다. 강연에 온 대부분이 대학생으로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지도하는 교수와 일반인도 더러 있었다. 강연이 시작되고 수십 분이 지나서야 집중하는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강연자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짐작에 화가 조금 났던 마음이 선명하다. 떠드는 분위기에도 언니는 침착하게 강연을 이어가셨다.
그로부터 풍덩풍덩 세월이 흘러 삼십 대가 되고, 번아웃을 자진모리장단 두드리듯 겪고, 달이 뜬 밤마다 퇴근하는 날들을 흘러보냈다. 어느 휴일 봄날, 수개월이 지나서야 그가 37년 만에 복직하고 명퇴한 2월 25일의 발언 영상을 마주했다. 나는 언니의 복직 기사를 놓쳤다.